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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소중함에 경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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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아이를 키우며 나를 키우며』 펴낸 대학(성균관대)의 국문과 강사인 고정욱씨(31)와 그의 아내 이연숙씨(27)가 둘 사이에 아들 빈첸시오 범준(범준)이 한생명의 존재로 들어앉았음을 확인한 것은 1988년 8월17일의 일이었다.
결혼 후 한달 남짓을 넘긴 그날 첫새벽 이연숙씨는 생각해도 「너무나 신기한 꿈」을 꾸었고, 그게 태몽이라면 애써 약속받은 길조를 흐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남편에게조차꿈얘기를 할 수 없었다.
그날 오후 이연숙씨는 병원으로 갔으며 간단한 검사로 임신을 확인한 의사는 그녀에게『축하합니다』고 말했다.
남편과 함께 병원문을 나서던 길로 이연숙씨는 문방구에 들러 까만 표지가 둘린 두꺼운 노트 한권을 샀다.
두사람의 사랑이 절정에서 만나 맺은 한 소중한 생명을 위해 이제부터 그 생명의 꿈틀거림이 안기는 환희의 순간들을 빼놓지않고 글로 남기겠다고 했다.
분만후가 아니라 엄마의 자궁속에 생명이 박히는 원초의 순간을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들의 육아일기와는 달라도 한참 다른, 그래서 「생명일기」라고나 해야마땅할법 한 고정욱·이연숙 부부의 『아이를 키우며 나를 키우며』(고려원 간)가 책으로 엮어져 나오게된 첫머리 사연이다.
임신을 확인한 그날부터 아내는 뱃속의 아기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며 거기 엄마의 간절한 기원을 담아 일기를 써나갔다.
남편은 책상위에 펼쳐져 있는 그 일기를 매우 뜨거운 가슴으로 읽었다.
비록 아내의 몸을 빌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기의 성장이 지니는 의미는 부부가 똑같이 공유해야하며 책임도 함께 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때부터 고정욱씨는 아내의 글옆 빈자리에 자신의 일기를 썼다.
그렇게 두사람은 번갈아가며 근 2년동안 까만 노트 두권에 글을 채웠다.
『부부가 함께 살아가면서 겪고 느끼는 모든것을 아기에게 숨김없이 얘기해 주었어요. 기뻤던일, 슬펐던일, 서로에게 섭섭했던 일들을 빠짐없이 거기 적었습니다. 따라서 이 일기는 아기를 매개로한 우리 두사람의 대화와 일상적인 삶의 흔적에 대한 기록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지요』라고 고정욱씨는 말한다.
근거는 없어도 왠지 꼭 사내아이리라 싶어 미리 빈첸시오란 이름까지 지어두었던 아기가 89년 4월9일 새벽 세상에 나왔다.
유리상자속에 잠들어 있는 『코가 오똑하고, 머리는 촉촉히 젖어서 곱슬이고, 피부가 하얀 아기』를 상면했을때의 감격을 고정욱씨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아빠는 피곤해도 기분이 좋아서인지 더이상 잠자고 싶지는 않더구나. 그때부터 아빠는 일어나서 아빠친구들에게 부지런히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전화받는 사람마다 축하한다, 부럽다, 좋겠다며 칭찬·부러움·축하의 세례를 퍼부었다. 아, 나도 이제 아빠가 되었구나!』그날 이후 쓰여진 두사람의 일기는 미지의 길을 더듬는 탐험가의 조심스러움과 한편으로는 그 과정에서 발견하는 새로움에 대한 경이의 정서로 점철되고 있다.
아기는 때로 감기가 걸려 괴로워하기도 했고 이유없이 경기를 하는 바람에 아무 겪음도 없는 아빠·엄마의 가슴을 졸였다.
몸을 뒤칠 무렵에는 침대에서 방바닥으로 굴러 떨어져 아빠에게 「너무 놀라 온몸의 털구멍이 다 오그라드는」 서늘함을 안기는가 하면 언젠가는 전기밥통의 뜨거운 김에 손을 데 부랴부랴 병원신세를 지기도 했다.
그런 조바심속에서도 범준이는 자연의 섭리를 어기지 않고 무럭무럭 컸다.
태어나 두어달 지나면서부터 시작한 옹알이, 백일이 가까워오자 아기는 어르면 생긋생긋 웃고 목도 제법 가눴다.
넉달 지나서는 몸을 뒤집고 다시 배밀이 동작에 이어 일곱달째로 들어서던 10월 29일에는 배를 올린채 두팔·두다리로 방바닥을 기기 시작했고, 또 그 달포뒤에는 어느 누구의 도움없이도 홀로 설수 잇게 됐다.
성장에 따라 아기가 보여주는 변화의 마디마디들을 고정욱씨는 곤충이나·파충류의 탈바꿈에 비유했다.
『이 세상에 나오면서부터 아빠에게 수많은 탈바꿈의 모습을 경이롭게 보여준 범준이다. 우유를 점점 많이 먹는 것, 이유식을 하게된 것, 혼자 누웠다가 뒤집는 것, 옹알이를 쉴새없이 하는 것, 이가 난 것, 앉은 것, 혼자 보행기를 밀고 다니는 것, 그토록 무관심하던 천장에 달아둔 모빌을 어느날 뚫어져라고 보기 시작한 것, 또 그 모빌을 어느날 갑자기 흥미없어 하면서 소리나는 장난감만 찾던 것, 우유병을 혼자 들고 먹는 것, 그림책의 현란한 색깔을 보고 울음을 그칠 정도로 즐거워하던 것 등등.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범준이의 가장 큰 탈바꿈은 역시 이세상에 네가 나온것이었다』고아빠는 썼다.
1988년 8월17일부터 90년 1월28일까지 아기를 키우면서 겪은 별스럽지 않은 이야기와 단상들을 일기로 엮은 이 『아이를 키우며, 나를 키우며』의 머리글에서 고정욱·이연숙씨 부부는 『우리는 범준이를 거의 남의 도움없이 둘이 함께 키웠습니다. 우리 사랑의 결실이고 하느님의 소중한 선물인 아기를 키우는 일에 엄마의 몫, 아빠의 몫이 따로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었지요』라고 적고 있다.
그들은 또 아기를 키운 경험이없어 당연히 많은 시행착오와 실수를 저질렀지만 『아기는 고맙게도 무럭무럭 커 주었고, 어느날 문득 아기를 키우면서 우리 부부 역시 아기만큼이나 많이 크고 있음을 느꼈습니다』고도 썼다.
아빠 고정욱씨는 대학강사로 일하면서도 장차 쓸만한 소설가로 서겠다는 꿈이 더 야무진 사람이고 엄마 이연숙씨 또한 늘 읽고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아 글솜씨가 녹록지않게 익어있다.
이 책이 감동적으로 읽히는 이유는 행간에 밴 사랑의 마음과 진실성 위에 곰살갑게 어느 사연이라도 녹여낼 수 있는 예의 그 글솜씨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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