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설득과정없이 밀실결정/걸프전 추가지원 자청 속사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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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대미 관계 강화 감안한 고육책/전후 미 주도 새 질서 편입 겨냥
걸프전의 다국적군에 대한 2억8천만달러 추가지원내용 결정을 보면 최근 우리 정부가 대미 관계에 얼마나 고심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사실 정부는 올해들어 눈에 띄게 대미 관계강화를 강조해왔다.
노태우 대통령은 최근 경제장관들의 올해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한미 통상관계에 마찰이 없도록 하라』며 미측의 요구가운데 들어줄 것은 최대한 적극적으로 들어주라고 지시했다.
노재봉 국무총리도 이번 임시국회의 국정보고에서 『한미 관계를 심화발전시키는 것이 우리 외교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면서 『국력신장과 경제의 국제화에 따른 역할을 분담,상호 보완적이고 성숙한 동반자 관계로 발전시켜 나갈 것』이라고 대통령의 뜻과 같은 말을 했다.
노총리는 특히 제4차 한미 경제협의회에서 우리측이 굴욕적이다시피 미측에 약속한대로 과소비억제운동이 결코 수입품 차별정책이 아니어야 한다는 점을 전공무원에게 숙지시키기 위한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외무부 역시 청와대 업무보고에서 올해 외교목표의 최대역점 사업으로 한미 관계의 강화를 들었으며 통상마찰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조기경보체제를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30일 발족한 한미 통상실무회의는 매월 한차례씩 우리정부의 관계자와 주한 미대사관의 경제담당관들이 모여 한국내 미기업들이 영업상의 애로는 없는지,우리 정부가 한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 공동 확인·점검하고 있다.
공보처도 미국의 대한 인식에 오해가 있다면 이를 불식해야 하며 이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것이 올해의 주요 국정목표중 하나라고 밝히고 있다.
『미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말자』는 구호적 분위기가 정부안에 온통 팽배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번의 추가지원결정 과정도 그렇다. 정부가 가장 내세우는 점은 미국의 요구에 앞서 우리가 자발적으로 지원규모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상옥 외무장관은 30일 저녁 지원규모를 공식발표하면서 『이번의 추가지원은 다국적군 특히 미국을 위한 것』이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정부가 이토록 미국의 눈치를 지극정성으로 살피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의 불이익이 너무 명백히 예상되기 때문이며 이런 사정은 일본·독일 등도 마찬가지다.
우선 정부는 이렇게 함으로써 미국의 승리가능성이 높은 전후의 논공행상에서 유리한 위치에 진입할 수 있다고 본다. 미국의 「손볼」대상국이 안되어야 함은 물론 떡이라도 하나 갈라먹을 대상이 되려면 미국이 필요할때 화끈하게 봐주는 것이 낫다는 계산이다.
소련이 종이호랑이로 판명되어 냉전의 시대가 가고 미국주도의 세계질서가 재편되는 흐름에 맞춰 세계각국이 너도나도 미국의 환심을 사려 안달하는 분위기를 우리라고 외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 미대사관과 외무부에서는 이런 점을 고려,걸프전쟁 발발직후부터 자발적인 추가지원 결정원칙을 관계요로에 건의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아무리 대미 관계가 중요하더라도 정부가 추가지원의 궁극적 부담자인 국민들에 대한 설득과정을 생략하고 물밑에서 액수를 결정해 미국에 알려주고 국민에겐 일방통보한 것은 일을 옳게 추진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국민적 합의과정 없이 알아서 기는 정부의 태도가 먼 눈으로 볼때 과연 건강한 한미 관계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특히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악화된 반미 감정등을 고려할때 정부가 미국과 추가지원규모를 좀더 당당하게 협의하면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해 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바로 이런 점을 야당이 문제삼을때 추가지원안은 국회통과 과정에서 적지않은 논란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평민당의 조순승의원은 『우리의 어려운 경제사정 즉 국제수지적자폭을 들어 미국을 설득할 여지가 없게끔 정부가 외교정책을 자승자박했다』고 지적했다.
즉 과거의 적대국인 소련에 30억달러나 주겠다면서 미국에 돈이 없다고 할 수 있었겠느냐는 점이다.
야당측은 또 개인의 호주머니돈이 아닐진대 최소한 야당과 사전에 귀띔과 협의는 했어야했다고 지적했으며 더욱이 군수송기가 파견되면 다국적군의 일원이 되는 것인데 결국 전투병파견의 빌미를 준비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정부는 전투병수송을 하지는 않을 방침이라고 하지만 이종구 국방장관은 벌써 다국적군의 일원임을 강조하고 있어 결국 「전투병」파견의 징검다리를 놓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많다.
따라서 평민당은 여론의 추이를 보아가며 일단은 추가지원결정을 재고하라고 요구하는 바탕위에 대응책을 세워나갈 태세다. 그러나 평민당으로서도 미국과의 관계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어서 파병동의안의 국회처리는 반대여론이 들끓지 않는한 「소극적 반대」 정도에서 협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이재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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