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워홀 그래픽전-서울대미술관, 내년 2월 10일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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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앤디 워홀 자신의 모습을 소재로 한 1982년작 ‘자화상’(보드에 스크린프린트).

"캔 따위나 그린 그림이 뭘…." 이렇게 폄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1928~87)의 영향력은 넓고도 깊다. 마크 로스코, 잭슨 폴락으로 대표되는 1950년대 미국 추상주의를 단박에 전복한 팝아트의 대부다. 오늘날 네오팝.정치팝 이라는 파생적인 장르로 긴 생명력을 전파하고 있는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서울대미술관의 '앤디 워홀 그래픽 전'은 워홀의 전 생애에 걸친 작품과 뒷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의미있는 전시다. 20대 때 광고디자이너로 일하며 그렸던 '빨간구두' 드로잉부터 켐벨스프 이미지로 만든 옷'수퍼 드레스', 죽기 직전 작품인 '카모플라지(위장)'시리즈까지 다채롭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

워홀이 마릴린 몬로의 초상화로 유명해진 1962년 몬로는 세상을 떠났다. 워홀은 이듬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제까지 해 온 모든 것이 죽음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되돌아보면 그간 몬로와 리즈 테일러, 그리고 대중적인 상품을 소재로 한 화려한 작품의 이면에 죽음과 파멸의 이미지가 도사리고 있었다.

1971년작 ‘총’(종이에 스크린프린트). 사람을 죽이는 도구를 통해 죽음이나 폭력성을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워홀은 이후에도 케네디 대통령 장례식에 나온 재클린 케네디의 모습을 담은'재키Ⅱ', 싱싱교도소의 사형의자 사진을 소재로 한 '전기의자'에서 죽음의 메시지를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심지어 워홀의 가장 인기있는 작품 중 하나인 '달러 사인'에도 우중충한 검은색이 얼룩덜룩 칠해질 정도다. 서울대미술관 정형민 관장은 "워홀은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었던 것 같다. 죽기 몇년 전 자화상에서도 짙은 죽음의 그늘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누구보다도 유명해지고 싶어한 워홀에게도 죽음은 끊임 없이 반추해야할 화두였나보다.

"모든 이를 위한 아트"

캠벨스프 디자인을 촘촘히 배열한 1960년작 ‘수퍼 드레스’(면에 스크린프린트). 워홀은 개인전 홍보를 위해 이 옷을 대량 생산해 판매했다고 한다.

"워홀은 자신을 "최초의 상업예술가"라고 불렀다. 돈을 버는 예술이 진정한 예술이라 여겼고, 처음부터 팔릴 만한 작품을 제작했다. 대중에게 친숙한 이미지를 선호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실크스크린이라는 대량생산 방식을 택했다. 때문에 그의 작품은 '세상에 하나 뿐인'유화와 다르게 숫자가 상대적으로 많았다. 이번 전시작 62점은 모두 미국인 콜렉터 글라피라 로살레스의 소장품이다. 앤디 워홀 작품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전시장을 방문한 로살레스는 "지금까지 가장 뛰어난 작가라고 여겨 주로 그의 작품을 구입해 왔다. 내 소장작 600여 점 중 최고라고 여기는 작품이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워홀의 조수를 친구로 둔 덕분에 스튜디오를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던 로살레스는 "워홀은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항상 분주하게 일을 하고 있던 모습만 기억난다"고 회상했다. 내년 2월 10일까지. 입장료 3000원. 02-880-9509.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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