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 분야 연구보다 '돈 되는 기술'로 승부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2면

"나는 벨연구소의 비전과 전략, 그리고 구조를 모두 바꿨다."

재미 과학자이자 경영인인 김종훈(46.사진) 벨연구소 대표가 최근 홍콩에서 열린 국제통신연맹(ITU) 텔레콤 월드 행사에서 언론 인터뷰를 하며 한 말이다. 지난해 4월 쇠락해 가던 이 '공룡' 연구소를 맡은 뒤 연구소 조직과 문화를 근본적으로 혁신해온 그가 드디어 결과물을 내놓았다.

6일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에 따르면 김 대표는 주요 고객사에 최근 개발을 마친 4종의 상용 제품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김 대표가 연구소를 맡은 지 1년 반 만이다. 이들 제품은 시장에 내년 3월 출시될 예정이다.

이번 신제품 개발은 벨연구소의 변신이 가시화한 것이란 점에서 세계 정보기술(IT) 업계의 큰 관심거리다. 지난 81년 동안 이 연구소가 채택했던 기초 연구 중심 전략을 완전히 탈피, 시작부터 수익성을 염두에 두고 개발한 첫 실적물인 것이다. 김 대표는 부임 이후 연구의 초점을 기초 분야에서 바로 상용화가 가능한 분야로 돌리는 승부수를 던졌다.

1925년 설립된 이 연구소는 트랜지스터와 태양전지.발광다이오드(LED)를 비롯한 인류 문명에 획을 긋는 획기적인 발명품들을 잇따라 내놓으며 세계 통신 기술의 발전을 주도해 왔다. 배출한 노벨상 수상자만 11명, 보유 특허는 3만여 건에 이른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상당수 발명과 특허는 상용화나 제품화되지 않고 사장됐다. 96년 모기업인 루슨트테크놀로지스가 AT&T에서 분사하고, 그 후 IT 거품이 꺼지면서 연구소는 급속히 위축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4월 김 대표가 구원투수로 투입된 것이다. 그리고 모기업인 루슨트테크놀로지스는 1일 프랑스 알카텔과 합병해 세계 최대 통신장비 업체가 됐다.

그는 출시될 신제품에 대해 인터넷 통신과 보안, 위치기반(LBS) 무선 서비스 분야 등의 장비라고만 밝혔다. 그가 평소 언제 어디서나 통신망에 접근할 수 있는 '유비쿼터스 네트워킹'을 강조해 온 만큼 이 분야의 현 기술 수준을 한 차원 높일 제품일 것으로 업계에서는 짐작하고 있다. 그는 지난해 방한 때 휴대전화로 음성은 물론 냄새와 촉감까지 전달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 상용화할 계획이라고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 대표는 IHT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가진 연구 자산을 모기업의 수익으로 연결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최근 세계 각지에 특화된 연구개발(R&D) 센터를 세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벨연구소는 2004년 아일랜드에 물류시스템 관련 연구소를 세운 데 이어 올 6월에는 서울 상암동에 연구센터를 설립하기 위해 서울시와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아일랜드와 서울의 R&D 센터는 회사가 모든 비용을 대는 게 아니라 현지 정부와 대학이 연구진 월급의 절반을 부담한다. 이런 조건으로도 스코틀랜드 등 세계 각지에서 연구소 설치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고 김 대표는 밝혔다.

조민근 기자

◆ 김종훈 대표=한국에서 태어나 중학 시절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메릴랜드 대학원에서 2년 만에 공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92년 설립한 초고속교환기(ATM) 개발 벤처기업 유리시스템스를 98년 루슨트테크놀로지스에 10억 달러에 매각, 단숨에 미국 400대 갑부 대열에 오르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지난해에는 미국 범아시아 상공회의소가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아시아인 10인'에 꼽히기도 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