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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잡, 니잡, 차도르, 그리고 아바야

중앙일보

입력

뉴스위크국기를 제외하면 역사상 그 어떤 천도 베일만큼 강력한 힘을 부여받지 못했다. 여성을 해방하거나 탄압하고, 결집시키거나 분열시키는 측면에서 그렇다.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여성들은 베일을 겸손.경건, 그리고 저항의 의미로 착용했으며, 자유.힘, 그리고 항의의 뜻으로 벗어던졌다. 무슬림 정부들은 머리 가리개 착용을 깊은 신앙심의 표시로 법제화했으며, 세속화에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로 금지하기도 했다. 자유주의적인 서구 사회의 입장에서 히잡(얼굴은 놔두고 머리만 가리는 일종의 스카프)은 현대의 핵심적 고민을 그대로 보여준다. 바로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겠다는 공약과, 통합과 사회적 융합을 구현하려는 이상을 어떻게 조화시킬까 하는 문제다.

베일은 전통의 유산으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그 사용은 어쩌면 그 어떤 복장보다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종종 한 나라에서도 불과 몇 년 사이에 권장되고, 금지됐으며, 개인의 선택에 맡겨지기도 했다. 사실 역사를 통해 베일의 의미는 당대의 정치.사회적 세력이 결정했다.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특징이 있다면 베일이 이슬람 전통의 보편적 상징이란 점이다. 또 하나 있다. 여성들은 베일을 착용하라거나 벗으라는 식의 강요를 거부한다는 점이다. "여성들은 베일을 착용하라고 압박하면 저항하고, 벗으라고 압박하면 역시 이에 저항한다"고 카타르 대학교의 인류학 교수 파드와엘-귄디는 말했다. "베일은 해방의 좋은 상징이다."

베일에 항상 종교적 함의가 깃들어 있지는 않았다. 이슬람 이전 시대만 해도 베일은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의 상류층 아랍 여성들이 착용했다. 이들은 신분의 상징으로 자신들의 머리를 가렸다. 17세기가 되면서 갈수록 많은 상류층 여성이 자신을 하층 계급과 구별하려고 베일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이슬람 제국의 확장으로 코란이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가르친 겸손이 상류층 사회의 관습과 융합되면서 베일과 이슬람 신앙 사이에 상관관계가 생겼다. 코란은 여성들에게 베일 착용을 강요하진 않았다. 하지만 예언자 무하마드의 부인들에겐 그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게끔 머리를 가리도록 권장했다. 잉글랜드의 버밍엄대에서 중동 문제를 가르치는 하이파 자와드는 "이슬람이 제국주의화하면서 많은 문화적 인습이 이슬람 사회에 스며들었다"고 말했다.

18세기가 돼서야 오늘날의 사우디아라비아 땅에서 베일 착용이 정착했다. 당시 알-사우드가(家)는 이슬람 지도자인 무하마드 빈 압둘 와하브의 지도 아래 그 지역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힘을 합쳐 와하비즘(코란을 자구대로 해석하는 보수파 이슬람)을 창시했다. 그들은 무하마드의 부인들에게 명령한 머리 가리개 착용이 모든 무슬림 여성에게 적용돼야 할 뿐 아니라 전신을 가리도록 확대돼야 한다고 믿었다.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의 종교 경찰은 적절한 복장을 갖추지 않은 여성이 눈에 띄면 시비를 건다.

이슬람이 서구 식민주의를 접하면서 베일은 여러 의미가 깃든 정치적 상징물로 변했다. 알제리 여성들은 수시로 베일을 착용했지만 1830년 프랑스군이 몰려와 아랍어 학습을 금지하고 머리 가리개를 벗도록 장려하면서부터 베일을 벗어던졌다. 그러나 여성들은 승리하지 못했다. 프랑스인들은 서구 복장을 한 여성들을 "헤프다"며 경멸했기 때문이다. 알제리 독립전쟁(1954 ̄62) 기간 동안 여성들은 자신들의 국가적 자긍심을 내세우려 다시 베일을 착용했다. 때론 그 속에 폭발물도 숨겼다. 이집트에선 영국 식민정부 총독인 크로머경이 베일은 서구 문명의 초석을 세우는 이 나라의 능력에 "치명적 장애물"이라고 주장했다.

중동의 일부 민족주의자들도 이에 동조했다. 19세기 말께 진보적 무슬림 지식인들도 베일 착용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프랑스에서 교육받은 이집트 율법학자 카심 아민은 '여성 해방'(The Emancipation of Women)이란 책을 출간하면서 이슬람은 머리 가리개 착용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1923년엔 이집트의 여권운동가 후다 샤라위가 로마에서 여권신장을 주제로 열린 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오자마자 카이로 기차역에서 자신의 얼굴에서 베일을 벗어던지며 유명해졌다. 많은 지지자가 그녀의 용기에 갈채를 보냈다.

20세기 동안 일부 중동 지도자들은 서구 문화를 포용하는 자신들의 태도를 알리려 베일 착용을 금지하기 시작했다. 터키를 건국한 케말 아타튀르크는 정부 사무실에서 머리 가리개 착용을 금지한 데 이어 세속적인 가치를 확산시키려 유럽식 복장을 강요했다. 이슬람주의 정당인 복지당은 1990년대 중반 잠시 집권하면서 베일 착용 금지조치를 완화했다. 이로써 독실한 무슬림 여학생들이 검은색 차도르를 착용하고 이스탄불 거리를 활보하게 됐다. 그러나 1997년 터키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이슬람주의자들을 몰아내면서 새 정부는 베일 금지법을 다시 제정했다. 논쟁은 지금도 계속된다. 이슬람주의 정당으로 현 정부를 주도하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총리는 베일 금지법 폐기를 수차례 밀어붙였다.

이란에선 서구화에 앞장선 레자 샤 팔레비(팔레비 왕조의 시조)가 1936년 베일 착용을 금지해 여성들에게 전통적인 차도르 대신 서구식 모자를 쓰거나 맨 머리를 그대로 드러내게 했다. 경찰은 차도르 착용을 고집하는 여성의 차도르를 수시로 찢어 여성 다수가 집에 머물렀다. 새로운 복장 관련 법에 반대하는 시위가 열리자 팔레비 왕의 군대는 시위자 수십 명을 사살했다. 79년 이슬람 혁명을 향해 나아가는 기간에 여성들은 팔레비 정권의 '서구적 독성'을 거부하며 다시 베일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그런 여성들이 아야톨라 호메이니 옹의 이슬람주의 정부가 이란 헌법을 고쳐 공개적 장소에선 히잡을 착용하도록(아니면 채찍 74대를 맞도록) 하자 충격을 받았다. 종교 경찰들은 위반자를 찾아 거리를 순찰했다.

더 최근엔 베일이 이슬람 민족주의의 보다 강력하고 새로운 상징이 됐다. "그것은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되찾는 동시에 밖에서 들여와 강요당하는 상품들이나 원치 않는 외국의 가치와 사상의 거부를 의미한다"고 엘-귄디 교수는 말했다. 시카고대에서 종교학을 가르치는 마고 바드란 교수는 1차 걸프전 때 쿠웨이트를 점령한 이라크군에 맞서 싸우던 현지 여성 전사들을 인터뷰했을 당시 이미 60년대에 아바야(머리와 몸 전체를 하나의 천으로 감싸는 긴 옷)를 불태워 버린 여성 중 일부가 전시엔 저항의 뜻으로 그 옷을 착용한 사실을 알았다. 여성 전사 중 한 명인 라이아 알-포다리는 그녀에게 "우리는 이라크인들의 눈에 띄고 싶지 않기 때문에 검은색 아바야와 선글라스를 착용했다"고 밝혔다. 아바야는 위장 목적도 있었지만 탄약을 감추는 데에도 효과적이다.

베일은 한 나라의 여성들 간에도 크게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소련 지배를 받을 당시 카불에 살던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은 베일을 벗고 학교에 가도록 권장하는 개혁을 포용했지만 시골 여성들은 그런 개혁을 거부했다. 탈레반은 1996년 권력을 잡은 뒤 여성들에게 부르카 착용을 강요했다. 학교도, 직장에도 못 가게 된 여성 다수는 두문불출했다. 2001년 미국 주도의 침공으로 탈레반이 몰락하자 서구인들은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부르카를 내던지리라 기대했다. 더러는 지시에 따랐지만 훨씬 더 많은 수의 여성들은 전통에서든, 아니면 공격이 두려워서든 부르카 착용을 계속 고집했다.

무슬림 국가에서 새로운 기회를 추구하는 여성들에게 베일은 종종 장애물이 아니라 도움을 준다. 카이로의 여성 사무직 근로자들은 베일이 공개적인 공간에서 갈수록 높아지는 자신들의 위상을 안전하게 지켜준다는 사실을 알았다. "베일을 착용한 이들 여성 다수가 집 밖에서 일하며 남성.여성과 함께 일한다"고 노터데임대에서 이슬람 문제를 가르치는 아스마 아프사루딘은 말했다. "그들에게 베일은 공개적 공간으로의 접근을 제한하기보다 향상시키는 의미가 있다." 대단한 진보처럼 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베일의 역사가 우리에게 뭔가 가르쳐준 점이 있다면 바로 해방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CARLA POWER, REBECCA HALL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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