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남친 사귈수 있어”…섹시 코미디 도전한 다운증후군 발레리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0면

연극 ‘젤리피쉬’에서 모녀로 호흡 맞춘 배우 정수영(왼쪽부터)·백지윤, 민새롬 연출이 13일 모두예술극장 무대에서 연습 중 포즈를 취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연극 ‘젤리피쉬’에서 모녀로 호흡 맞춘 배우 정수영(왼쪽부터)·백지윤, 민새롬 연출이 13일 모두예술극장 무대에서 연습 중 포즈를 취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27세 다운증후군 여성 켈리(백지윤)가 어느 날 바닷가에서 30대 비장애 남성 닐(김바다)과 사랑에 빠진다. 엄마 아그네스(정수영)의 반대에도 임신까지 한다. 다운증후군 여성의 사랑과 독립을 발랄하게 그린 영국 연극 ‘젤리피쉬’가 국내 초연한다.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공연제작사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공동 제작으로, 22~28일 서울 서대문구 모두예술극장에서 관객을 만난다.

‘젤리피쉬’는 영국 극작가 벤 웨더릴 원작으로, 2018년 영국 런던 부시 시어터 초연부터 “현실을 반영한 섹시 로맨틱 코미디”(가디언)라는 호평을 받았다. 영국 내셔널시어터(2019), 호주 뉴시어터(2023) 공연까지 다운증후군 배우가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됐다. 한국판 주연은 다운증후군 무용수 출신 배우 백지윤(33)이 오디션을 통해 발탁됐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발레를 해온 그는 디지털서울문화예술학교 무용학과 출신으로, KBS ‘인간극장’(2010), 2013년 평창동계스페셜올림픽 발레 ‘지젤’ 무대를 통해 ‘기적의 지젤’로 불렸다. 2019년 드라마 ‘고고송’(CGN TV)에 출연한 적은 있지만, 주연은 처음이다.

백지윤이 분한 켈리의 대사는 솔직하고 발칙하다. “나는 닐이랑 섹스하는 거 다 좋아” “나도 남자친구 사귈 수 있어. 여긴 자유 국가야” “나 버려. 이해할게. 근데 그게 (우리) 엄마 때문인 건 안 돼” “난 좋은 엄마가 될 거야” 등 그간의 장애인 캐릭터와 다르다. 장애인과 사귄다는 이유로 혐오와 의심 섞인 시선을 받는 닐의 고충도 생생하다. 켈리에게 항상 “너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다”고 했던 엄마 아그네스도 딸이 자신처럼 다운증후군 자녀 때문에 고생할까 봐 두려워한다.

김범진(사진 오른쪽)

김범진(사진 오른쪽)

지난 13일 연습 중이던 백지윤을 아그네스 역의 정수영(52), 민새롬(44) 연출과 함께 만났다. “켈리는 사고 치는 애다. 저보다 똑똑하고 강하다”고 소개한 백지윤은 “무용은 몸으로 호흡하면 되는데, 연극은 대사랑 동선이랑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몇달 전부터 대사를 여러 번 반복해서 외웠다”며 “힘들어도 좋아하는 사람들과 같이해서 재밌다”고 활짝 웃었다.

작은 키(1m42㎝)에 선천적으로 약한 근력·균형감을 “발레하는 즐거움”으로 극복했던 백지윤은 보통 2개월 정도인 공연 연습을 4개월가량 진행했다. 장애인 공연 제작 방법론을 개척하려고 출발한 기획이다. 프롬프터를 무대 앞에 설치했고, 장애·비장애 출연, 제작진의 협업을 돕는 ‘창작 조력자’ 직 도입, 긴장·불안감을 해소하는 ‘감각 워크숍’ 등을 진행했다. 민 연출은 “지윤씨가 사회생활 훈련도 잘돼있고 암기력도 탁월한데 추상적 단어를 어려워했다”며 “작품 줄거리를 프린트해 벽에 붙여 놓으니 지윤씨뿐 아니라 다들 시각적 이해도가 높아졌다”고 전했다. 이어 “15년간 연출하면서 왜 이렇게 안 했을까 싶을 정도였다”고 덧붙였다.

찬찬히 눈을 맞추며 가까워지는 시간도 가졌다. 정수영은 “지윤은 본능적인 배우”라며 “한 달 만에 눈동자를 마주쳤는데 정말 맑더라. 켈리 대사가 100% 다가와서 울컥했다”고 말했다. 극 중 켈리와 닐의 로맨스를 백지윤은 어떻게 느꼈을까. 두어 번 교제 경험이 있다는 그는 “우리 가족은 (남자친구) 만나는 걸 반대하지 않는데 아그네스는 반대한다. 위험하니까”라면서도 두 주인공이 천생연분인 이유를 차분히 설명했다. “닐은 잘생기고 켈리 말에 웃어주고 장난도 치고 잘 배려해줘요. 켈리는 닐보다 똑똑하고 완벽하고요.”

장애 청년 도미닉 캐릭터는 원래 정신장애인데, 한국판은 설정을 바꿔 연극 ‘파우스트’ ‘코리올라누스’, 영화 ‘고속도로 가족’ 등에 출연한 저신장 배우 김범진을 캐스팅했다. 공연을 기획·공동제작한 석재원 프로듀서는 “한 장애인 단체는 ‘다운증후군에 대한 해석이 틀렸다’ ‘이렇게 부모에게 대들지 않는다’고 항의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민 연출은 “장애·비장애 구분보다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서로 다른 취약성을 들여다보게 하는 따뜻하고 매력 있는 작품”이라며 “극 중 인물들이 그 취약성을 어떻게 돌파하는지 봐주시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