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하다” → “안 한다”…반복되는 정책 뒤집기에 혼란 가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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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국가통합인증마크(KC) 없는 어린이ㆍ전기ㆍ생활용품 등의 해외 직접구매(직구) 차단을 발표했다가 3일 만에 철회했다. 정부 정책에 민감한 소비자뿐 아니라 중소 유통업체 입장에서도 큰 혼란을 겪게 됐다. 이 같은 정책 뒤집기는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축소했던 연구·개발(R&D) 예산은 올해 대폭 확대하기로 했고, 반도체 투자세액공제는 하루 만에 공제율을 높이기도 했다.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20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해외 직접구매(직구) 논란과 관련해 "국민께 혼란과 불편을 드려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20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해외 직접구매(직구) 논란과 관련해 "국민께 혼란과 불편을 드려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소비자 역풍 예상 못 한 정부 

20일 관계부처 등에 따르면 전날 국무조정실 주재로 해외 직구 대책 관련 브리핑을 열고 “80개 직구 품목에 대한 금지·차단이 아니다”고 밝힌 건 소비자 반발 때문이다. 익명을 원한 해외 직구 종합대책 태스크포스(TF) 관계자는 “국내에서 판매하는 사업자들은 모두 KC 인증을 받고 있다”며 “국내 사업자 역차별 문제와 직구 상품의 안전 문제 등이 제기됐던 만큼 소비자 반발이 거셀 것이라곤 예상 못 했다”고 말했다.

결국 일부 품목의 직구 제한을 추진하면서 소비자 불만을 예상하지 못 했다는 의미다. 직구 차단 발표 이후 미국·유럽에서 어린이 관련 제품을 직구하는 부모들의 반발도 컸지만, 최초 보도자료와 브리핑 땐 이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C커머스(중국 e커머스)에 집중하다 보니 실제 소비자가 받을 영향 파악에 미흡했다는 풀이가 나온다.

지난 16일 정부의 해외 직구 관련 발표 이후 네이버 맘카페엔 “직구 금지라니 흥선대원군도 아니고” 등의 게시글이 수십 건 올라왔다. 네이버카페 캡처

지난 16일 정부의 해외 직구 관련 발표 이후 네이버 맘카페엔 “직구 금지라니 흥선대원군도 아니고” 등의 게시글이 수십 건 올라왔다. 네이버카페 캡처

예산·세제도 오락가락 반복

1년 단위로 계획을 세우는 예산의 경우 지난해 줄어든 연구개발(R&D) 예산이 올해는 역대 최대 규모로 늘어날 예정이다. 지난해 예산안 편성 때는 예산을 31조1000억원에서 26조5000억원으로 15%가량 삭감한 바 있다. R&D 예산이 33년 만에 줄어들면서 과학기술계와 정치권 등에선 날 선 비판이 쏟아졌다. 올해는 R&D 예비타당성조사도 전면 폐지하는 등 관련 기조가 정반대로 바뀌었다.

세율도 오락가락했다. 지난해 기획재정부는 대기업 반도체 시설투자에 대한 세액공제율을 8%에서 15%로 높였다. 정부가 이 같은 방침을 발표한 건 지난해 1월3일이다. 국회에서 세액공제율을 6%에서 8%로 2%포인트 높이는 법 개정안이 통과한 지 불과 열흘 만이다. 이른바 ‘8% 안’은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이 그대로 통과한 것이었다.

반도체 투자 세액공제율을 상향하기 1주일 전에도 추경호 당시 경제부총리는 “우리나라 반도체 세액공제는 특히 R&D 부문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고, 절대 낮지 않은 수준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밝혔다. 반도체 투자에 대한 정부 지원이 부족하다는 지적에 “8%면 충분하다”는 취지로 항변하면서다. 정부가 입장을 바꾸기까진 불과 1주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여론 의식한 정책 뒤집기

앞서 공정위는 대기업집단 총수일가가 사익편취를 했을 때 이에 관여한 총수일가를 함께 고발하는 내용의 고발 지침 개정안을 행정예고했다가 철회했다. 한국경제인협회 등 재계에서 반발이 거세게 나오면서다. 이에 대해 공정위 관계자는 “법이나 시행령이 아닌 내부 지침 개정하는 것이었는데 예상한 수준보다 반대가 거셌다”고 설명했다. 이후 시민단체에선 “공정거래법 집행의 예측 가능성을 떨어트렸다”는 지적이 나왔다. 정책을 발표해놓고 여론을 과도하게 의식해 뒤집었다는 뜻이다.

지난해 3월 서울대학교 학생회관 벽에 서울대 학생 모임 비정규직없는서울대만들기공동행동이 작성한 '근로시간 69시간 개편안' 전면 철회 촉구 대자보가 붙어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3월 서울대학교 학생회관 벽에 서울대 학생 모임 비정규직없는서울대만들기공동행동이 작성한 '근로시간 69시간 개편안' 전면 철회 촉구 대자보가 붙어 있다. 연합뉴스

정책의 영향을 받는 수요 대상에 대한 고민이나 의견 수렴 과정이 충분하지 않다 보니 이 같은 정책 뒤집기가 벌어졌다는 풀이가 나온다. 앞서 근로시간 유연화를 추진하다 ‘69시간 논란’에 갇혀 재검토에 들어간 근로시간제 개편안도 마찬가지다. 국민의힘 추경호 원내대표도 이날 “당정 협의 없이 설익은 정책이 발표돼 국민 우려와 혼선이 커질 경우, 당도 강한 비판의 목소리를 낼 것을 분명히 밝힌다”고 밝혔다.

정세은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직구 관련해 위해성 문제가, R&D 관련해 예산 나눠먹기 문제가 있었던 게 사실이지만 해결 방법이 거칠게 나왔다”며 “이번 정부 들어 당위성을 앞세워 이해관계자 의견 수렴이나 공론화 과정 없이 조급하게 발표하는 경우가 많아 보인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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