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재외공관 테러 경보, 회색지대 도발에 대비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김호홍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대북전략센터장

김호홍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대북전략센터장

북한이 최근 중국과 동남아·중동 등지에서 대한민국 공관과 국민을 대상으로 위해를 시도하는 징후가 정보당국에 포착돼 비상이 걸렸다. 정부는 즉각 테러대책 실무위원회를 소집해 캄보디아·라오스·베트남 주재 대사관, 블라디보스토크와 선양 총영사관 등 5개 재외공관의 테러경보를 ‘관심’에서 ‘경계’로 두 단계 상향했다. 북한의 테러 위협으로 재외공관에 대한 경보가 상향 조정된 것은 2010년 3월 북한의 천안함 폭침 이후 14년 만이다.

북한은 쿠바·이란·시리아와 함께 미국이 지정한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라있다. 북한이 1988년 1월 처음으로 테러지원국 명단에 포함된 데는 한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83년 아웅산 테러, 1987년 대한항공 858기 폭파 사건이 직접 원인이 됐기 때문이다. 2008년 일시 해제됐으나 2017년 재지정돼 현재까지 매년 명단에 올라 있다.

5개 공관 테러경보 두 단계 상향
북, 엘리트층 탈북 차단용 포석
북한의 외곽 때리기에 대비해야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가 새로 개발한 저격수 보총 성능을 점검하는 모습.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13일 김 총비서가 지난 11~12일 제2경제위원회 산하 중요국방공업기업소들을 현지지도했다고 보도했다. 노동신문=뉴스1.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가 새로 개발한 저격수 보총 성능을 점검하는 모습.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13일 김 총비서가 지난 11~12일 제2경제위원회 산하 중요국방공업기업소들을 현지지도했다고 보도했다. 노동신문=뉴스1.

북한은 테러지원국 지정에 반발하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테러 반대’ 입장을 내세우고 있다. 2001년 빈 라덴이 이끌던 알카에다 세력에 의해 9·11 테러가 발생했을 때 북한은 테러리즘의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곧바로 ‘테러에 대한 재정 지원 금지 국제협약’과 ‘인질 반대 국제협약’에 서명했다. 당시 북한은 “모든 반테러 협약에 가입했다”고 선전했다. 지난 3월 모스크바 공연장에서 테러가 발생하자 김정은은 “테러를 반대하는 공화국 정부의 입장은 시종일관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처럼 요란한 정치적 수사에도 북한이 테러와 직간접적인 연계를 갖고 있다는 의혹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최근에는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 공격 당시 북한제 로켓 사용이 포착됐다. 테러 단체에 대한 북한의 무기 공급이 국제적으로 이슈가 됐다.

국가정보원은 하마스가 북한제 무기를 사용하고 있다는 외신 보도에 관해 '동일하게 판단한다'고 8일 밝혔다. 이와 함께 국정원은 한글표기가 된 F-7 로켓의 부품 사진 1장을 공개했다. 국가정보원.

국가정보원은 하마스가 북한제 무기를 사용하고 있다는 외신 보도에 관해 '동일하게 판단한다'고 8일 밝혔다. 이와 함께 국정원은 한글표기가 된 F-7 로켓의 부품 사진 1장을 공개했다. 국가정보원.

미국은 2017년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하면서 그 근거로 “북한이 해외 암살 사건과 연루되고 테러 행위를 반복적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우리 정보당국이 입수한 북한의 테러 기도 첩보의 신빙성을 높게 볼 수밖에 없는 정황들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왜 현시점에 해외에서 대남 테러를 획책하고 있을까. 먼저, 최근 해외 체류 북한인 이탈 증가에 대한 보복 차원일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 국내 입국 북한이탈주민은 모두 196명으로 2022년(67명) 대비 3배 가까이 늘어났다. 특히, 외교관 등 엘리트 계층 탈북은 10명 안팎으로 2017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북한은 오래전부터 해외 거주 엘리트층의 탈북에 한국 공관원이 개입됐다고 주장해왔다. 2016년 태영호 전 주영국 공사가 공개 활동을 시작하자 사흘 뒤 ‘남조선 괴뢰 당국이 해외에서 벌이는 비열한 반공화국 모략책동의 진상’이라는 제목의 보도에서 한국 공관원들의 탈북 유도를 맹비난하며 후과를 위협했다. 이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한국 공관원들에 대해 직접적 위해를 가함으로써 활동을 위축시키고 북한 외교관과 무역일꾼들에게는 경고 시그널을 발신해 추가 탈북을 차단하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태영호 전 주 영국 북한대사관 공사가 2016년 12월 국회 정보위원회에 출석해 망명 후 한국에서 생활하며 느낀 점을 언급했다. 사진공동취재단.

태영호 전 주 영국 북한대사관 공사가 2016년 12월 국회 정보위원회에 출석해 망명 후 한국에서 생활하며 느낀 점을 언급했다. 사진공동취재단.

둘째, 김정은이 한국을 ‘제1의 주적’이자 ‘교전 중인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하고 대남 적개심을 고취한 연장선에서 ‘제3 형태의 도발’을 선택할 가능성이 거론된다. 현시점에 북한의 대남 직접 도발은 한·미 동맹의 강력한 대응태세와 보복 응징 리스크, 국제사회 역풍 가능성 등으로 실행에 옮기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실질적 타격을 가하면서도 주체·원점 추적이 어려운 이른바 ‘회색지대 도발’은 매력적인 옵션이다.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성동격서(聲東擊西)식 외곽 때리기 전술로 한국을 궁지로 몰아넣겠다는 계산으로 보인다. 북한의 소행임이 확실시됐지만 결국 ‘단순 강도 살인’ 사건으로 처리돼 미궁에 빠졌던 1996년 블라디보스토크 최덕근 영사 피살 사건을 재현하겠다는 것 아닌가.

1996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피살된 故 최덕근 영사의 영결식이 서울강남구일원동 삼성의료원 영안실에서 미망인 김영자씨와 딸 성이씨등 유가족과 직장동료 2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수되고 있다. 중앙일보.

1996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피살된 故 최덕근 영사의 영결식이 서울강남구일원동 삼성의료원 영안실에서 미망인 김영자씨와 딸 성이씨등 유가족과 직장동료 2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수되고 있다. 중앙일보.

북한의 대남 및 대외 공작사업을 지휘하는 김여정 당 부부장은 지난 17일 “적대세력들이 우리 국가를 상대로 한 음험한 정치적 기도를 노골화하는 데 정비례해 우리는 필요한 활동들을 더 활발히 진행할 것”이라고 대놓고 협박했다. 한국 공관원을 상대로 한 테러 준비와 무관하지 않아 보여 우려스럽다. 사전에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호홍 한국국가전략연구원 대북전략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