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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맛 전령사 쑥…국·떡에 ‘K디저트’ 쑥테린느까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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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3호 24면

풍류가 있는 제철 음식

요즘 우리는 계절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음식을 즐길 수 있는 먹거리 풍요의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계절에 거슬리는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과연 저 음식을 먹으면서 가슴 뜀과 행복감을 느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겨우내 기다렸다가 봄이 되면 산천 곳곳에 피어나는 나물을 뜯어 새콤 달콤 무쳐 먹는 향긋한 행복감을 알까?

먹거리에 진심인 우리 민족은 계절이 바뀌면 무엇을 먹을 지부터 고민했다. 선조들이 건강과 관련해 가장 열심히 지켰던 것이 바로 ‘계절에 따른 음식 먹기’였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는 계절에 따라 생산되는 식품들이 각기 달랐다. 때문에 건강과 관련한 보신 음식이란 제철에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을 주재료로 한 ‘계절 따라 음식 먹기’였다. 제철 음식은 바로 그 자체로 건강을 위한 최고의 약이기에 거르는 법이 없었다.

약애(藥艾), 약이 되는 쑥

쑥과 서양식 조리법이 만난 K디저트 ‘쑥테린느’. [사진 온지음]

쑥과 서양식 조리법이 만난 K디저트 ‘쑥테린느’. [사진 온지음]

봄이 오면 기나긴 겨울 동안 부족한 영양소를 보충하기 위해 여러 가지 봄나물을 챙겨 먹었다. 특히 왕실에서는 다섯 가지 시고 매운 봄나물로 만든 ‘오신반(五辛飯)’을 먹는 게 중요한 봄맞이 행사였다. 특히 쑥은 약이 된다는 의미로 ‘쑥 애(艾)’자에 ‘약(藥)’자를 붙여 ‘약애(藥艾)’라고 불렀다.

단군신화에도 쑥이 등장할 만큼 쑥은 우리와 너무나 가까운 식재료고 수천 년을 내려온 음식이다. 실제로 쑥은 악귀를 물리치고 액운을 없애준다고 해서 단오가 되면 쑥을 지붕에 얹어 두거나 쑥물에 목욕하고 또 아녀자들은 머리에 꽂기도 했다. 이는 모두 쑥의 뛰어난 약효 때문에 나온 풍습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흥미로운 쑥 이야기가 나온다. 정조 14년(1790)에 ‘전라도 관찰사가 죄인 조운기 등을 조사한 일을 계문하니 형조가 복계하다’라는 대목이다. 내용인즉슨, 방치갑이라는 이가 조운기에게 잘 보이기 위해 어장(魚醬)과 약쑥 따위를 슬며시 넘겨주면서 자진하여 그의 심복이 되었으니 이것만 해도 너무도 불측하다는 것이다. 당시 어장과 쑥은 귀한 뇌물이었던 셈이다. 조선시대 ‘왕의 일기’라 불리는 일성록에는 정조 18년(1794)에 대산목장에서 감영에 납부하는 품목으로 ‘약애(藥艾)’가 나온다. 약쑥은 군대에 필요한 중요한 군납품이기도 했다.

봄날의 향긋함을 맛볼 수 있는 ‘ 도다리쑥국’. [사진 온지음]

봄날의 향긋함을 맛볼 수 있는 ‘ 도다리쑥국’. [사진 온지음]

쑥은 그 자체의 강한 향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는데, 쑥의 강한 맛과 향기를 부드럽게 순화시킨 음식이 바로 ‘애탕(艾湯)’이라 불린 쑥국이다. 부드럽게 다져 양념한 쇠고기와 쑥을 잘 섞어서 먹기 좋은 크기의 완자를 빚어 끓인 국이다. 애탕 국 한 그릇을 먹을 때마다 쑥을 이처럼 부드럽게 만들어낸 지혜에 놀란다. 만약 쑥으로 애탕을 만들어 먹게 했다면 단군신화 속 호랑이도 부드러운 맛과 향에 순화되어 그렇게도 원하던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쑥과 쇠고기를 넣어 완자를 빚어 만든 완자탕을 조선시대 반가에서 주로 먹었다면, 남쪽지방에선 좀 더 색다르게 먹었다. 바닷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생선인 도다리에 그냥 생쑥을 넣어 끓인 도다리쑥국이다. 생선 단백질로 영양도 챙기면서 쑥 향과 맛으로 행복감을 느낀 것이다. 이 도다리쑥국은 이제 전국구 음식이 되었다.

조선후기 화가 윤두서가 그린 ‘채애도’. [사진 고산윤선도유물전시관]

조선후기 화가 윤두서가 그린 ‘채애도’. [사진 고산윤선도유물전시관]

조선시대 풍운아 허균은 미식가를 넘어 탐식가였다. 긴 유배 기간 중 그를 견디게 한 것은 바로 미식의 추억이었다. 잘나가던 시절 자신이 맛본 음식이 머릿속을 떠돌자 이를 기록으로 남긴다. 푸줏간 대문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신다는 의미의 『도문대작(屠門大嚼)』(1611)이다. 전국 각지의 이름난 산물과 음식을 분류, 나열하고 명산지와 특징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덧붙인 일종의 팔도음식 유람기다.

특히 그는 시절마다 음식을 가려 먹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서울에서 계절에 따라 만들어 먹던 음식 43종을 기록했다. 봄에 먹어야 하는 음식으로는 쑥떡(艾糕), 느티떡, 두견전, 이화전을 들었다. 『고운당필기』 5권 세시풍속에도 “무규(武珪)의 ‘연북잡지’에는 발해의 요리사가 쑥떡을 올렸다”는 문장이 나온다. 이로써 쑥떡의 역사는 발해 시대까지 올라감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쑥떡은 인기몰이 중이다. 쑥버무리부터 쑥송편, 쑥절편까지 다양한 떡들이 우리를 유혹하고 쑥콩전, 쑥으로 곱게 물들인 석류만두도 눈을 즐겁게 한다. 특히 젊은 세프가 만드는 쑥떡은 매우 창의적이다. 얼마 전 쑥으로 만든 쑥 테린느(꾸덕하고 쫀쫀한 서양 디저트)를 맛보았다. 질감은 분명 쑥인절미에 가깝지만 화이트 초콜릿과 버터 등이 들어가 서양인들도 향이 강한 쑥을 거부감 없이 즐길 수 있도록 K디저트로 변신시켰다. 나이 든 나의 혀도 기꺼이 즐거웠다.

윤두서의 ‘채애도’와 정약용의 ‘채호’

‘쑥버무리’. [사진 온지음]

‘쑥버무리’. [사진 온지음]

전라남도 해남 땅, 윤선도 고택에는 귀한 풍속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윤선도의 증손인 윤두서의 ‘채애도(採艾圖)’다. 해남 윤씨 ‘윤씨가보’ 화첩에 들어 있는 그림으로, 봄날 산기슭에서 치마를 걷어 올린 채 나물을 캐고 있는 두 여성을 그린 작품이다. 봄철이면 약이 되는 쑥을 캐는 것이 집안의 중요한 대소사였고, 집안 어른인 윤두서는 이를 놓치지 않고 한 컷의 그림으로 남겨 가보로 전해지게 한 것이다.

이 ‘채애도’를 그린 윤두서는 정약용의 외증조부다. 1810년에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오게 된다. 다산초당에 머물면서 백성들의 곤궁한 삶을 목격하고, 그들과 함께 울면서 전간기사(田間紀事) 6편을 짓는데 제1수가 바로 쑥 캐기를 뜻하는 ‘채호(釆蒿)’라는 시다.

“…항아리엔 남은 양식도 없고…오직 사철쑥만이 살아나서/ 제기처럼 무성하게 되었네/ 말리고 또 말린 매실을 써서/ 삶아 쓰며 소금을 사용하여/ 나는 죽으로 굶주림 속이니/ 바라기는 다른 것 아니라네.” 일찍이 단군신화에도 등장했던 쑥은 약이면서, 또 굶주린 백성들의 생명줄이었다.

정혜경 호서대 식품영양학과 명예교수. 호서대학교 식품영양학과 명예교수이자 고려대 생활과학과 객원교수. 한국의 밥과 채소, 고기와 장, 전통주 문화에 관한 연구와 고조리서, 종가음식 등 다방면으로 음식연구를 해오고 있다. 현재 ‘온지음’ 맛공방 자문위원이기도 하며 『통일식당 개성밥상』 등 40여 권의 저서를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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