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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배덕 ‘나쁜 남자’ 바그너, 예술에선 위대한 개척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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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3호 22면

민은기의 클래식 비망록  

여성들은 왜 나쁜 남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일까. 혹자는 여성이 본능적으로 센 유전자를 가진 남성에게 끌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남을 괴롭히는 일은 동물의 세계에서는 강한 자의 특권이니까. 다른 이들은 그것을 금지된 것을 향한 갈망으로 설명한다. 가지기 힘들수록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법이라면서. 모성 본능이 강한 여성들이 나쁜 남자를 자신의 노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겠으나 누가 봐도 나쁜 짓만 하고 무례한 사람이 사랑을 받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그래서일까. 나쁜 남자는 종종 소설이나 영화 속 단골 캐릭터가 된다. 음악사에서는 리하르트 바그너가 나쁜 남자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매사에 자기중심적이었고, 호의를 베푼 사람에게조차 조롱과 비난을 서슴지 않았으며, 분에 넘치는 사치스러운 생활로 많은 빚을 지고 야반도주를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른 일도 많았으니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그는 남의 지갑과 남의 여자를 자기 것으로 여겼다고 전해질 정도다. 이런 심각한 도덕 불감증은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다.

바그너는 결혼에서부터 이미 그러한 일탈의 조짐을 보였다. 그의 결혼 상대는 네 살 연상의 아름다운 여배우 민나. 미혼모에 약혼자까지 있었던 그녀는 작은 극장의 음악감독이었던 바그너가 마음에 차지 않았으나 그의 집요한 구애에 약혼자를 버리고 그와의 결혼을 승낙한다. 신혼 생활을 시작한 러시아의 리가에서 바그너는 극장의 카펠마이스터 직을 잃어버리고 큰 빚을 지게 되었고 결국 야반도주를 감행한다. 그리고는 무모하게 당대 최고의 오페라 도시였던 파리에서 데뷔를 시도했다가 아무런 수확도 없이 엄청난 빚만 지게 된다.

“바그너는 모든 것 집어삼키는 불꽃”

바그너는 리스트의 딸인 코지마와 오랜 불륜관계였다. [사진 사회평론]

바그너는 리스트의 딸인 코지마와 오랜 불륜관계였다. [사진 사회평론]

상황이 이쯤 되면 자신을 되돌아볼 법도 하건만 그는 실패의 원인을 자신에게 항상 친절을 베풀었던 오페라 거장 마이어베어에게 돌렸고 그를 자신의 성공을 방해한 위선자라고 맹비난했다. 게다가 자신이 그토록 소망하던 첫 성공도 마이어베어가 드레스덴 무대에 ‘리엔치’가 오를 수 있게 도와주었기에 가능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바그너는 마이어베어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경멸과 증오가 담긴 인신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드레스덴에서 그의 작품을 모든 청중이 외면했을 때 자신을 카펠마이스터로 초빙해 준 것이 작센 왕이었음에도 바그너는 드레스덴 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자신을 도왔던 왕을 배신한다.

그 후에도 그의 배덕은 계속된다. 혁명이 실패한 후 도망자 신세로 전락한 바그너는 그 와중에도 자신을 열렬히 신봉해서 후원을 약속한 여성과 불륜을 저질렀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이 그를 살해하겠다고 협박하는 한편 경찰 당국에 혁명분자로 그를 신고하는 바람에 또다시 급하게 도주의 길을 떠난다. 취리히로 망명한 후에 바그너는 자기의 예술에 매료된 성공한 사업가 베젠동크를 만나는데, 그가 자신의 채무를 모두 갚아주고 거처까지 마련해 주었음에도 그의 젊은 부인과 불륜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베젠동크로부터 적극적 후원을 받는 수년 동안 그 관계는 지속되었다.

가장 충격적인 스캔들은 그의 동지이자 은인이었던 리스트의 큰딸 코지마와의 불륜이었다. 이들의 관계는 코지마가 리스트의 애제자인 한스 폰 뷜러와 결혼해 신혼여행을 가는 길에 아버지의 지인인 바그너를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젊은 그녀와 관계를 지속하고 싶었던 바그너는 남편인 뷜러를 자기 오페라 공연의 지휘자로 캐스팅해서 이 부부를 뮌헨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코지마가 자기 자서전을 위한 구술을 받아 적어야 한다며 아예 자기와 같은 빌라에 살도록 했다. 코지마는 바그너와 사이에서 두 딸과 아들을 차례로 출산했고, 아이들의 이름을 바그너 오페라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짓는다. 그런데도 이들의 관계를 알지 못했던 뷜러는 충실한 바그너의 추종자로서 그의 작품을 열성적으로 지휘했다.

이 정도의 파렴치한이라면 바그너는 온통 적으로 둘러싸여 고독하게 인생을 마감했을 것 같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바그너는 친구를 사귀고 관계를 유지하는 데 별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그는 늘 주변 사람들을 배신하고 화나게 했지만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끊이지 않았다. 예술적 재능뿐 아니라 놀라운 언변과 유려한 글솜씨도 그에 한몫했을 것이다. 그가 내뿜는 카리스마와 아우라는 주위 사람들을 자신의 충실한 후원자로 만들었다. 바그너 전문가인 음악학자 어네스트 뉴먼은 바그너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불꽃”이었다고 말한다.

혐오? 숭배? 중간적 선택은 어려워

루드비히 2세를 매료시킨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 [사진 사회평론]

루드비히 2세를 매료시킨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 [사진 사회평론]

바그너 인생에 있어서 또 다른 반전은 난관으로 점철된 그의 인생에서 위기의 순간마다 기대하지 않았던 귀인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는 전쟁 통에 태어나 몇 달 만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어머니와 재혼한 양부는 바그너를 친아들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드레스덴의 작센 궁정 극단의 배우였던 양부는 바그너를 극장에 데리고 다니며 연극의 세계에 눈뜨게 해주었다. 불행히도 양부는 바그너가 7살 때 폐병으로 세상을 떠나는데 그의 지인이었던 카펠마이스터 칼 마리아 폰 베버의 도움으로 바그너는 극작가의 꿈을 키워갈 수 있었다. 바그너가 드레스덴 혁명의 주모자로 지명 수배를 받아 목숨이 위태로웠을 때는 리스트가 나서서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고 돈과 위조 여권을 주어 바그너는 취리히로 망명을 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바그너의 삶에서 최고 반전은 루드비히 2세와의 만남이었다. 바그너가 빈에서 막대한 빚을 지고 채권자들을 피해 변장까지 하고 도망을 다니고 있던 시절 루드비히 2세 덕분에 그의 처지가 완전히 바뀌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바그너의 글을 탐닉하고 바그너의 ‘로엔그린’을 통해 그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던 루드비히 2세는 18세에 왕으로 부임하자마자 바그너를 찾아와서, 그 많던 바그너의 부채를 모두 청산해 주고 아무런 의무나 조건 없이 거금의 연봉을 지급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바그너가 작곡 중인 ‘니벨룽의 반지’ 연작에 관한 얘기를 듣자마자 6만 마르크에 달하는 거액의 작곡료를 하사했고 작품의 저작권까지 미리 3만 굴덴에 사주었다.

바그너의 거처는 왕이 머무는 슐로스베르카 성의 호숫가 맞은 편에 있어서 그는 왕과 매일 같이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바그너에 대한 왕의 사랑은 점점 더 커져서 급기야 그를 위해 ‘로엔그린’을 모티브로 한 성을 건설하기에 이른다. 디즈니 성의 원형으로 유명한 노이슈반슈타인 성이 그것이다. 이 성의 거의 모든 방은 바그너가 연출했던 오페라의 무대 장면들로 꾸며졌다. 루드비히 2세가 못 말리는 건축광으로 터무니없이 국가 재정을 낭비하는 바람에 41세에 정신 질환자로 몰려 폐위를 당하기는 했지만, 바그너에게만큼은 강력한 권력과 막대한 부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의 예술적 이상을 이해하는 더할 나위 없는 후원자였음이 분명하다.

바그너의 또 다른 추종자 히틀러. [사진 사회평론]

바그너의 또 다른 추종자 히틀러. [사진 사회평론]

바그너의 큰 흠결로 지적되기도 하지만 히틀러로부터의 숭배 역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세계사에서 그 어떤 예술가도 히틀러 같은 강력한 최고 권력자에게 그토록 전폭적인 찬양을 받은 사례를 찾기 힘들다. 비록 그것이 그의 사후에 벌어진 일이라고는 해도 그렇다. 강력한 독일 제국을 꿈꾸었던 히틀러에게 바그너는 단순한 예술가가 아니라 게르만 민족의 위대함을 예술로 증명한 천재이자 영웅이었다. 독일의 민중적 영웅 서사시와 설화에 토대를 둔 작품을 통해 독일 정신과 민족적 정체성을 구현했던 바그너만큼 독일민족의 우월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낸 예술가는 없었기 때문이다. 바그너가 자신의 삶과 작품 속에서 일관되게 반유대주의적 태도를 견지했던 것도 히틀러가 바그너를 예찬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히틀러는 바이로이트의 바그너 축제에 해마다 참석하여 이 극장을 독일민족의 성지이자 나치교의 신전으로 만들어버렸다.

바그너는 양면적이고 모순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음악사에서 늘 문제적 인물로 거론되곤 한다. 개인적 삶에서는 은혜를 모르고 배덕했으나 예술에서 그는 완벽하게 새로운 예술을 꿈꾸는 개척자였다. 그래서일까. 그는 우리에게 중간적 선택을 허락하지 않는다. 혐오 아니면 숭배일 뿐. 한 인간의 위대한 예술적 성취가 그가 저지른 심각한 잘못을 덮어줄 수 있을까. 그의 인생과 예술은 우리에게 매우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민은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하고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5년부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음악과 페미니즘’ ‘독재자와 음악’ ‘대중음악의 역사’ 등을 주제로 여러 권의 저서를 출판했으며 최근에는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시리즈를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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