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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성중의 행복한 북카페

병적인 자기 환상에 사로잡힌 사나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김성중 소설가

김성중 소설가

이 세상에는 한 번 들었거나 보았을 뿐인데 잊히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예를 들어 『그림자를 판 사나이』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그렇다. 기이하고 신비로운,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 같아서 오래도록 뇌리에 남는 이야기들. 독일 작가 에른스트 호프만의 『모래 사나이』 역시 그런 작품에 속한다.

어린 시절 잠 안 자고 버티는 어린애의 눈알에 모래를 뿌린다는 모래 사나이의 이야기를 들은 나타나엘은 아버지를 만나러 오는 코펠리우스 교수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믿는다. ‘망태 할아버지’의 독일어 버전쯤 되는 이 이야기는 이후 주인공에게 모래 사나이-코펠리우스-코폴라로 이어지는 독특한 환상으로 자리 잡게 된다. 변장한 모래 사나이가 자기 인생에 번번이 출몰해 눈알을 노린다는 집착에 사로잡힌 것이다. 합리적인 약혼녀 클라라는 이런 망상을 바로잡아주려 하지만, 정작 나타나엘이 반한 것은 이웃의 처녀 올랭피아다. 올랭피아는 태엽을 감아 돌리는 자동인형에 불과했으나, 그에게는 자신을 지지하는 이상적인 여성으로 보인다. 이처럼 나타나엘은 남이 보는 것은 보지 못하고, 남이 볼 수 없는 것만을 본다. 그는 왜 번번이 착각에서 벗어날 기회를 놓치는 걸까? 안정과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삶을 놔두고 병적인 자기 환상에 빠져 파멸에 이르는 것일까?

행복한 북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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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프로이트가 ‘두려운 낯섦’이라는 논문에서 다룬 바 있다. 눈을 뽑으려 하는 것은 거세를 의미하며 올랭피아는 나타니엘의 분신이라고. 그러나 ‘정신분석’으로 문학작품을 대하는 것은 거미줄처럼 얇고 섬세한 비단옷을 탈곡기에 털어 아우라를 사라지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자기만의 세계에 ‘먹이를 주는’ 쪽으로 발전해온 나타나엘은 얼핏 예술가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진정한 예술가는 저자인 호프만이다. 그는 나타나엘이면서 동시에 그 세계에서 빠져나와 냉정하게 기술하는 또 다른 눈을 가졌으니까. 인간에게는 두 눈이 필요하다. 주관과 객관, 이성과 환상을 보는 두 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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