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중앙] 커버스토리 | “사람에게 투자해 기회 사다리 복원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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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경기도 新 경제전략, ‘휴머노믹스’
김동연 지사, 도정 핵심 경제 전략 ‘휴머노믹스’로 사람 중심 정책 추구
사회적 가치 창출 기회소득 제공하고 AI 등 인간 중심 4차산업혁명 주도 

3월 13일 오전 경기도청 다산홀에서 ‘인공지능(AI), 기회와 도전’이라는 주제로 열린 강연에서 김동연 경기도지사와 김대식 카이스트 교수 등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사진:경기도

3월 13일 오전 경기도청 다산홀에서 ‘인공지능(AI), 기회와 도전’이라는 주제로 열린 강연에서 김동연 경기도지사와 김대식 카이스트 교수 등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사진:경기도

미술관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사방의 벽을 따라 알록달록한 그림들이 걸려 있다. 10여 점의 그림이 저마다 독특한 개성을 뽐낸다. 프러포즈를 앞두고 초조하게 연인을 기다리는 검은 고양이부터 화관(花冠)을 머리에 인 사슴, 먹음직스런 햄버거까지 장르도 천차만별이다. 참여한 작가들의 사진과 소개도 붙어 있는 게 영락없는 실제 미술관 판박이다.

경기도가 발달장애인들의 예술 활동을 돕기 위해 지난해 시작한 ‘경기도 인공지능(AI) 창작단’ 활동의 일환으로 운영 중인 메타버스 전시장 모습이다. 지난해 4~5월 경기도청에서 오프라인 전시회를 가졌고, 온라인 가상공간(메타버스)에서 상설 전시 중이다. ‘창조의 경계를 넘어 모두를 위한 예술 혁명’이란 슬로건으로 발달장애인 15명이 AI와 협업해 만든 작품들을 선보였다.

경기도 AI 창작단은 김동연 지사 취임 후 역점을 둔 ‘경기지피티(GPT)’ 추진계획에 포함된 사업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으로 주목받는 GPT를 도정에 접목하기 위해 전담기구를 만들고 인공지능 콜센터, 발달장애인 예술활동 교육 등의 로드맵을 지난해 3월 발표했다. 인공지능 시대에 가장 소외된 계층을 포함해 모든 사람이 AI를 활용하는 사회를 실현하는 게 AI 창작단의 궁극적 목표다.

이에 따라 지적장애와 자폐성 장애가 있는 10~30대 발달장애인 15명을 모집해 AI 활용 예술활동교육을 진행했다. 현업 작가와 수원대 미대 학생들이 이들의 작품 활동을 도왔다. AI를 활용해 발달장애인의 예술 활동을 교육하고 예술가와 협업해 작품을 제작·전시하고 공연함으로써 AI 기술과 예술의 융합을 통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데 의미를 뒀다.

경기도 AI 창작단은 김동연 지사가 새로운 경제정책 노선으로 제시한 ‘휴머노믹스(Humanomics)’ 철학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사례다. 김 지사는 지난 2월 14일 도의회 시정연설에서 휴머노믹스를 도정 핵심 전략으로 제시했다. 사람에 대한 투자를 강화하고, 사람 중심 경제 전략을 추구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어 3·1절 기념행사에서 김 지사는 “사람에 대한 투자로 새로운 기회의 사다리를 놓겠다”고 밝혔다.

물고기 주는 게 아니라 잡는 법 가르쳐 불평등 해소

경기도는 휴머노믹스를 새로운 도정 전략으로 정하고 관련 정책 발굴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발달장애인들의 예술 활동을 돕기 위해 지난해 시작한 ‘경기도 인공지능(AI) 창작단’ 활동의 일환으로 운영 중인 가상공간(메타버스) 전시장 모습. / 사진:경기도

경기도는 휴머노믹스를 새로운 도정 전략으로 정하고 관련 정책 발굴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발달장애인들의 예술 활동을 돕기 위해 지난해 시작한 ‘경기도 인공지능(AI) 창작단’ 활동의 일환으로 운영 중인 가상공간(메타버스) 전시장 모습. / 사진:경기도

휴머노믹스는 기존 경제학의 맹점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 경제학 이론으로, 201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경제학에 인문학적 성찰과 방법론을 더해 양극화 등 기존 경제학에서 비롯된 문제를 극복하자는 취지다. 2010년 실천경제학자 바트 윌슨이 제안한 뒤 대안적 경제 이론으로 지지를 받고 있다. 쉽게 말해 ‘사람 중심 경제’를 이르는 말이다.

독일의 저명한 사회학자 페터 슈피겔은 저서 [휴머노믹스](다산북스, 2009)에서 “기존 경제학이 자본이 자본을 불리는 시스템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한 서민이 부자를 따라잡을 수 없게 하고 개발도상국은 영원히 선진국이 될 수 없게 만든다”고 지적하면서 “스스로 자립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으로 개인들이 ‘자기 삶의 경영인’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휴머노믹스의 문제의식은 기술의 발달이 양극화를 심화하고, 양극화가 심해질수록 사회적 비용이 증가한다는 데 있다. 인간을 위한 기술적 진보가 오히려 인간다운 사회의 걸림돌이 되는 역설을 시장의 자발적 양심에 맡겨둘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와 지방정부가 휴머노믹스를 정책 노선으로 채택해 개인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 정책의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게 휴머노믹스를 지지하는 이들의 주장이다.

휴머노믹스가 기존 복지정책과 가장 다른 것은 시혜적 관점이 아니라 개인의 성장과 발전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국내에서 휴머노믹스를 연구한 전병조 여시재 특별연구원(전 KB증권 사장)은 “이전의 모든 정책에 인본주의적 요소가 가미돼 있었다. 그러나 휴머노믹스는 이런 관점을 명시적으로 고려함으로써 정책 선택의 기준을 제시한다는 점이 기존 정책 과정과 다르다”고 설명한다.

대표적으로는 200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방글라데시 경제학자 무하마드 유누스가 설립한 그라민은행이 휴머노믹스를 적용한 사례다. 유누스가 운영한 그람시 은행의 활동은 ‘자선’이 아니라 빈민을 대상으로 한 ‘대출 사업’이었다. 그람시 은행은 담보가 아닌 구체적인 상환 계획을 요구했고, 돈을 빌린 이들은 건전한 수입처를 찾아 상환 계획을 이행하면서 빈곤의 그늘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놀라운 변화가 나타났다.

경기도가 휴머노믹스를 정책 노선으로 채택한 것은 국내 지방정부 중에선 첫 시도다. 경기도가 운용하는 1년 예산 규모는 30조원을 넘는다. 지자체 중 가장 규모가 크다. 경기도의 휴머노믹스 실험이 비상한 관심을 끌 수밖에 없는 이유다. 김 지사의 발표 이후 휴머노믹스에 기반한 경기도 정책들이 구체화하고 있다.

특히 김 지사의 트레이드마크인 기회소득과 결합한 정책들이 눈에 띈다. 김 지사의 기회소득은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활동을 촉진하는 경제적 투자라는 점에서 휴머노믹스 철학이 반영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이는 사회적 가치 창출과 관계없이 보편적으로 지급하는 기본소득과 뚜렷한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샘 알트먼 오픈AI CEO가 암호화폐로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실험은 보편적 복지와 AI에게 노동 기회를 빼앗긴 데 대한 보상의 성격이 강하지만, 김 지사의 기회소득은 사회적 가치 창출의 대가란 점이 다르다.

사회적 가치 창출 기여자에게 ‘기회소득’을

지난해 7월 20일 경기도청에서 열린 예술인기회소득 최초 수령자와 간담회에서 김동연 지사와 참석자들이 한 참석자의 바이올린 즉흥 연주를 감상하고 있다. / 사진:경기도

지난해 7월 20일 경기도청에서 열린 예술인기회소득 최초 수령자와 간담회에서 김동연 지사와 참석자들이 한 참석자의 바이올린 즉흥 연주를 감상하고 있다. / 사진:경기도

도정 전략이 휴머노믹스로 모아짐에 따라 기회소득 관련 사업들도 탄력을 받게 됐다. 우선 예술인에게 기회소득을 지급해 창작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예술인 기회소득은 지난해보다 확대 시행된다. 지난해 132억원에서 207억여원으로 예산을 대폭 늘렸다. 참여 시·군도 28개로 늘었다. 중위소득의 120% 이하인 예술가 1만3850명이 연간 150만원의 기회소득을 받는다.

마을공동체를 통해 아동 돌봄의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아동돌봄기회소득’도 올해 하반기 시행을 앞두고 있다. 만 12세 이하 영유아와 초등학생을 돌보는 5인 이상 공동체 참여자에게 월 20만원을 제공하는 내용이다. 정부와 지자체의 여러 돌봄 관련 제도와 정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 마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공동체를 구성해 아동을 함께 돌보고 공동육아를 함으로써 돌봄 공백을 해소하고 아울러 지역사회가 함께 아이를 돌보는 사회적 가치를 창출한다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농어업 종사자에게 지급하는 농어민기회소득도 올해 하반기 지급을 목표로 준비에 한창이다. 지급 대상은 일정한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농촌 소멸위기에 대응해 공익적인 기능을 유지하고 지속해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다. 이를테면 식량 안보나 환경보전, 경관 및 전통 유지 등에 기여하거나 청년, 귀농인 등 농어촌 재생의 주요 인적자원에 해당하는 경우다. 일정한 심사 과정을 거쳐 대상자로 선정되면 매월 15만원씩 연간 180만원을 지역화폐로 지급한다.

소득이 아닌 ‘기회’ 자체에 방점을 찍은 사업들도 경기도의 휴머노믹스 정책 생태계를 이루는 요소다. 청년들에게 배움과 진로 개척 동기를 부여하고 계층 이동과 미래 도전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둔 ‘경기청년 사다리 프로그램’이 대상자 모집에 들어갔다. 도내 청년 270명을 선발해 9개 해외 대학의 연수 기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4월까지 대상자 선발을 거쳐 7~8월 연수를 진행한다. 선발된 청년에게 대학 연수비와 항공료, 숙박비, 식비 등 해외 연수 비용 일체를 지원한다. 연수는 3~4주에 걸쳐 어학 수업과 문화 체험, 팀 프로젝트 수행 등으로 진행된다. 연수 후에는 성장사례를 공유하고 진로 컨설팅도 연계한다.

지난해 처음 시행해 좋은 반응을 얻었던 ‘경기청년 갭이어 프로그램’도 규모를 키우고 내실을 더해 본격 추진된다. 관심사가 비슷한 또래들과 함께 원하던 일을 경험해 보고 새로운 진로를 설계할 기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인데, 지난해 첫 회인데도 600명 모집에 1048명이 지원해 높은 관심을 받았다.

디자인, 교육, IT, 영화·드라마, 음악, 음식, 여행, 방송, 스포츠 등 관심 분야에서 스스로 기획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성과를 공유하는 방식이다. 올해는 800명으로 규모를 늘리고, 프로젝트 설계·실행에 ‘기회 더하기’ 프로그램이 추가됐다. 우수 참여자가 도전을 이어 나갈 수 있는 추가 지원금을 제공하고, 경기도와 공공기관의 맞춤형 취·창업 프로그램을 연결해준다. 4~5월에 참여자를 모집·선발하고 오리엔테이션(5월 말~6월 초)을 거쳐 6월부터 시작한다.

인간 중심 기술 혁명의 방법론 제시

김동연 지사의 핵심 정책인 기회소득은 휴머노믹스를 구현한 대표적인 정책이다. 3월 경기 예술인소득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사진:경기도

김동연 지사의 핵심 정책인 기회소득은 휴머노믹스를 구현한 대표적인 정책이다. 3월 경기 예술인소득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사진:경기도

4차 산업혁명 과정에서 인간 중심의 기술적 진보를 이룰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한 고민의 흔적도 여러 정책에서 엿보인다. 우선 지난 1월 세계경제포럼(WEF, 다보스포럼)에서 경기도와 WEF 협력방안의 일환으로 제안된 ‘4차산업혁명센터’ 설립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4차산업혁명센터는 2017년 샌프란시스코를 시작으로 15개국에 18개가 설립됐다. 산업·경제·사회 각 분야에 공정하고 인간 중심적인 변화를 위한 방안으로, 기술 분야에서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을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해외 전문가들과의 네트워킹을 통해 첨단산업과 스타트업을 지원하고, 산업 전환을 촉진하며, 기술활용을 극대화해 산업과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추구한다.

경기도에 설립할 센터의 명칭은 ‘Korea AI Innovation Center for Human & Earth’로 정했다. 경제과학진흥원, 차세대융합기술원, 중기중앙회, 벤처협회와 경기지역 주요 대학이 참여한다. 스타트업, 스마트매뉴팩처링, 기후변화 대응, AI 기술혁신을 중점 분야로 정했다. 6월에 법인을 설립해 운영을 시작할 계획이다.

첨단산업을 육성하는 데 있어서도 기업 유치를 통한 규모 확장에 그치지 않고 전문 인력 양성에 주안점을 뒀다. 국내에서 유일한 광역 클러스터로 구축되는 바이오광역클러스터 조성사업이 대표적이다. 바이오광역클러스터는 성남·화성·수원·시흥·고양 파주 5개 지역을 잇는 바이오산업 혁신생태계를 조성하는 사업이다. 다섯 가지 주요 사업은 인력 양성과 교류에 방점이 찍혀 있다. 연 500명 규모의 석·박사급 고급 인력과 연간 1000명의 글로벌바이오캠퍼스 연계 생산인력을 양성한다. 또 5년간 40개 벤처스타트업을 양성하고 글로벌 진출 역량 강화를 위한 교육과 컨설팅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국내외 바이오산업 협력 네트워크를 강화할 계획이다. 이 밖에 광교 바이오 유휴부지를 개발해 스타트업 보육을 지원하고 바이오기업 R&D 역량 강화를 위한 지원사업을 전개한다.

변화에 뒤처지지 않도록 정책적 뒷받침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일대에 조성되는 제3 판교테크노밸리는 대학 캠퍼스와 스타트업이 공존하는 자족도시로 개발된다. IT·BT·CT 대기업 위주의 제1 판교테크노밸리, AI·자율주행 분야 중견기업 위주인 제2 판교테크노밸리와의 차별화 지점은 청년과 반도체(팹리스)·게임·ICT 등을 위주로 한다는 점이다. 제3 판교테크노밸리에는 앵커기업과 스타트업, 연구소와 함께 첨단학과가 있는 앵커대학, 공공기숙사, 상업·문화시설 등이 들어선다. 올해 상반기에 대학 규모 등을 정하고 모집 공고를 거쳐 하반기 중 입주 대상 학교를 선정할 예정이다. 2025년에 공사를 시작해 2030년 개교를 목표로 하고 있다.

경기도의 한 관계자는 “경기도의 정책들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개인의 성장과 발전’을 최우선 가치로 두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앞서 망라한 경기도의 주요 정책에는 휴머노믹스의 핵심 가치, 즉 사회적 맞춤 교육, 자립과 성장·기회의 제공 등이 내포돼 있다. 2018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펴낸 ‘한국의 사회적 불안과 사회보장 관제’ 연구보고서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점점 빨라지는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이들이 뒤처지지 않도록 하는 정책적 동력의 필요성을 암시하고 있다. “자본은 인간의 지식과 능력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경제적 성과로 나타난다”는 슈피겔의 지적은 경기도 휴머노믹스 전략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김동연 지사는 지난해 4월 AI 창작단의 발달장애인 교육 현장을 찾아 “경기도가 장애인들에게 차별 없이 더불어 살 기회를 만들어 드릴 테니 여러분은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마음껏 누리고 힘차게 성장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여기에 김 지사가 휴머노믹스를 통해 구현하려는 비전이 압축돼 있다. “모든 개인은 삶의 경영인이 되어야 한다”는 무하마드 유누스 그라민 은행 총재의 잠언이 실현될 수 있을지 기대감이 커지는 이유다.

-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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