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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석천의 컷 cut

세상이 망해도 드라마 결말은 알고 싶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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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권석천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권석천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요즘 뜨고 있는 가수 비비(BIBI)는 노래한다. “아냐. 내가 늘 바란 건 하나야. 한 개뿐이야. 달디단 밤양갱.” 그가 “밤양갱. 밤양갱”을 스타카토로 부르는 이유는 분명하다. 자신이 바라는 건 많지 않고, 오로지 밤양갱 같은 달달한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영화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의 배경은 결코 다디달지 않다. 무서운 재난 상황이다. 한 가족이 오랜만에 휴가를 떠났는데, 갑자기 통신이 두절된다. 전화와 인터넷은 물론이고 모바일마저 먹통이다. 그뿐인가. 비행기가 추락하고, 자율주행 자동차들이 폭주한다.

컷 c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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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이 실성한 듯한 대혼란 속에서도 가족의 어린 딸 로지는 자신만의 ‘밤양갱’을 찾는다. 드라마 ‘프렌즈’의 마지막 편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 로지가 오빠에게 묻는다. “(‘프렌즈’의 주인공인) 로스와 레이첼의 결말을 결국 못 보겠지?” 오빠가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하자 로지는 “보면 행복해지잖아”라며 이렇게 답한다. “이 세상에 희망이 없다 해도 그들의 결말은 알고 싶어.”

오빠의 지적은 논리적으로 한치도 틀리지 않는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마당에 드라마 따위가 뭐 그리 대수란 말인가. 하지만 “세상이 무너져도 결말은 알고 싶다”는 로지의 말엔 에밀레종(鍾)과 같은, 묵직한 울림이 있다.

나 역시 영화와 드라마를 보며 삶의 고비 고비를 지나온 것 같다. 영화 ‘시네마 천국’을 보며 성장통을 겪어냈고,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를 보며 청춘의 강을 건넜다. 물론 그런 것들이 없어도 살았겠지만, 없었다면 인생의 많은 부분이 허전했을 터. 굵어진 잔뼈의 2할, 3할은 영화와 드라마 덕이다.

그러므로, 만일 오늘 지구가 멸망한다면 그동안 못 봤던 코미디 영화를 보며 웃음 짓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듯싶다. 그것이 내겐 밤양갱, ‘달디단 밤양갱’일테니까.

권석천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