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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태준의 마음 읽기

여우비와 봄 모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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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문태준 시인

문태준 시인

지난 일요일에 제주에는 봄비가 내렸다. 봄비의 빗방울이 유리창에 자분자분 떨어지는 소리에 새벽에 잠을 깼다. 누워서 그 소리를 한참 들었다. 간헐적이었지만 부드럽고 조용조용하고 찬찬했다. 봄비의 빗방울 소리는 마치 어르는 소리 같았다. 졸려서 칭얼대는 아이를 엄마가 달래듯이. 비는 낮에 그쳤다. 마치 봄 햇살의 기세에 밀린 듯이.

한 지인도 봄비에 시심(詩心)이 일었는지 윤동주 시인이 쓴 ‘햇비’라는 시를 내게 메시지로 보내왔다. 시의 첫 연은 이러하다. “아씨처럼 내린다/ 보슬보슬 햇비/ 맞아 주자 다 같이/ 옥수숫대처럼 크게/ 닷자 엿자 자라게/ 햇님이 웃는다/ 나 보고 웃는다” 햇비는 여우비를 이르는 단어이니 볕이 든 날에 잠시 오다가 멎는 비를 일컫는다. 푸슬푸슬 내리는 비의 성품을 아씨에 빗대었다. 적은 양이지만 이 비 덕에 만물이 더 왕성하게 자란다고 보았다. 옥수숫대처럼 푸르게 높게 늠름하게 자란다고 썼다. 어쩌면 너무 큰 기대가 들어있는 듯도 하지만, 그만큼 고맙고 귀한 비라는 뜻이겠다. 윤동주 시인이 ‘겨울’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처마 밑에/ 시래기 다래미/ 바삭바삭/ 추워요.”라고 겨울 절기를 노래한 것에 비하면 이 시 ‘햇비’에는 여우비를 노래했으나 오히려 봄 혹은 여름날의 햇살과 대기의 따뜻한 기운이 잘 느껴진다.

자분자분 듣는 비에 봄 완연해져
귀하게 모종법 알려준 가게 주인
마음에도 빛 들이고 움 틔웠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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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는 집 주변의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이제 호미를 쥘 때가 되었다. 풀이 자라는 밭으로 들어설 때가 되었다. 이 집에서 또 저 집에서도 밭에 들어가 풀을 매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날도 일찍 샌다. 마을에서 시내로 가는 첫차는 아침 6시 30분에 있는데, 그 첫 시외버스를 타기 위해 걸음을 재촉해 서둘러 가는 사람이 어느 집 누구인지 짐작할 정도로 날이 환해지는 시간이 빨라졌다. 마을 청년회에서는 이번 주말에 벚꽃이 피는 때에 맞춰 마을 축제를 열기 위해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비가 멎고 나서 오일장에 갔다. 톳과 물미역, 미나리를 파는 집을 지나 창포를 파는 가게 앞에서 한동안 서성거렸다. 어린나무와 화초와 모종을 파는 곳에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다. 백합 구근이 나와 있기에 그 앞에 쪼그려 앉아 백합 구근을 손으로 들었다 놓았다 하다 일어서 다른 가게로 갔다. 야생화 작은 화분을 몇 개 샀다. 그러고는 여러 종류의 모종을 파는 가게로 향했다. 오이 모종과 고추 모종, 상추 모종을 샀다.

모종을 파는 가게 주인은 뜻밖의 말을 내게 건넸다. 꽃샘추위가 온다고 하니 당장에 모종을 심지 말고 이틀 밤을 집안에서 재운 후에 노지에 모종을 하라는 것이었고, 노지에 모종을 심은 후에라도 날이 추워지면 이렇게 해서 모종에 씌워주라며 밑을 자르고 뚜껑을 뗀 투명 플라스틱 페트병을 높이 들어 보였다. 밑을 절단하고 또 뚜껑을 제거해서 공기를 통하게 한 투명 플라스틱 페트병은 말하자면 작은 온실 같은 것이었다. 그 작은 온실에 의지해 모종은 각각 제 지닌 뿌리를 땅속에 내리고 바람을 피하며 볕을 받아 자라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무턱대고 모종을 심은 후에 손을 놓고 기다리는 일이 작물을 기르는 사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작물의 생장을 도우려는 마음을 한시라도 쉬지 않는 것이 작물을 기르는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었으니 아직도 일이 서툰 나에게 자상하게 일러준 가게 주인의 얘기는 이 새봄에 내가 받은, 무엇보다 소중한 말씀의 선물이었다.

나는 최근에 ‘물결-삽목(揷木)’이라는 졸시를 지었다. 시는 이렇게 짧게 적었다. “낮의 화초(花草) 가지를 잘라 밤의 검은 땅에 심는다// 돋은 눈이 막 터지기 전의 긴 미명(未明)// 삼월의 눈은 살쾡이처럼 한 차례 더 찾아오리라” 삽목의 경험을 살려 절기의 미묘한 이동을 함께 노래하고자 했다. 말하자면 이 삼월은 밤의 어두운 시간에 낮의 밝은 시간을 보태는 때이고, 삽목한 가지에서 새로운 싹이 나기 직전의 때이며, 날이 밝아 올 무렵의 동쪽 하늘과도 같은 미명의 때에 해당할 것이다. 그래서 추위도 한차례 찾아오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의 시간이 늘어나고 삽목을 한 화초 가지에 싹이 움트는 이런 변화의 에너지는 더 세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의 행간에는 삼월을 사는 이즈음의 마음도 화초 가지 같았으면 하는 마음이 조금은 배어 있을 테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백합 구근을 망설이다 그만 사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소심해서 구근을 만지작거리다 내려놓고 말았다. 사서 온 모종과 이틀을 살고, 그 모종을 심고, 과일나무에 비료를 주고, 풀을 뽑은 후에 장이 서는 날에 가서 백합 구근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에는 봄볕이 백지처럼, 백합꽃의 흰 빛깔처럼 사방에 가득 내릴 것이다. 이 세계가 커다란 온실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