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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선데이] 쿠바 한인들의 디아스포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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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1호 29면

전후석 미국 뉴욕주 변호사·다큐영화 ‘헤로니모’ 감독

전후석 미국 뉴욕주 변호사·다큐영화 ‘헤로니모’ 감독

미국 동부 시간으로 지난 2월 14일 정오 무렵, 지인들이 휴대전화로 다급하게 ‘대한민국과 쿠바의 역사적 수교’를 전하는 뉴스 속보를 보내왔다. 흥분과 함께 언론 기사를 읽으며 필자는 9년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2015년 미국과 쿠바의 수교 발표 당시 필자는 뉴욕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다. 수교로 관광객들이 많이 몰리기 전에 미리 현지를 경험해보고 싶어서 그해 연말에 홀로 쿠바 배낭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수도 아바나 공항에서 만난 택시 기사로 인해 당초 계획과 달리 여행의 성격이 바뀌었다. 택시 기사는 일제 강점기였던 1921년 멕시코를 거쳐 쿠바로 건너가 에니켄(용설란의 일종) 농장에서 힘겨운 노동을 했던 한인의 3세였다. 그의 할아버지 임천택(1903~1985) 선생은 한인 노동자들과 함께 푼돈을 모아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 자금을 보냈다. 나중에 한국 정부에서 독립유공자로 선정돼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한·쿠바 수교는 기념비적 사건
한인 1세대 1900년대 초 이주
6·25에 충격, 귀국길 막히자 통곡
수교가 후손에 관심 계기 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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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택시 기사의 아버지는 1959년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 혁명에 참여해 고위 관리를 역임한 ‘헤로니모’ 임은조(1926~2006) 선생이다. 그 후 3년 동안 필자는 쿠바 한인들의 삶의 흔적과 디아스포라(이산) 역사를 추적해 다큐 영화 ‘헤로니모’를 2019년 세상에 선보였다.

이번에 한국과 쿠바의 수교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쿠바에 사는 1000여 명의 한인 후손들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필자에게 쿠바의 한인들은 쿠바와 한반도의 관계를 이해하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어떤 이에게 쿠바는 낭만적 혁명가 체 게바라,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살사 춤과 야구 등 문화적·상징적 형상들이 먼저 떠오를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어떤 이에겐 공산 혁명, 사회주의 체제, 북한의 형제국 등 정치·이념적 표상이 연상될 것이다. 경제와 인도주의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쿠바의 심각한 전력난과 식량난으로 50만명이 넘는 쿠바인들이 미국으로 망명을 떠난 사실을 떠올렸을 것이다. 미국과 서방의 금수 조치와 경제 제재로 쿠바 사람들은 북한처럼 오랫동안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다.

필자가 아주 궁금했던 것은 수교 협상을 한국 정부가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의미 부여를 하느냐였다. 대통령실은 수교에 대해 “북한과 우호 국가였던 사회주의권을 상대로 한 외교의 완결판”이라고 논평했다. “결국 역사의 흐름 속에서 대세가 누구에게 있는지 분명히 보여줬다”며 “이번 수교로 북한은 상당한 정치적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는 전망까지 덧붙였다. 반세기가 넘는 단절과 냉전 시대를 거치며 이념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던 적성 국가와의 관계가 복원된 것은 분명 상징적이고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하지만 이를 단지 남북 체제 경쟁의 승리를 자축하는 기회로 여기고 북한을 고립시키는 하나의 무기로 사용한다면 상상력의 빈곤이라 생각한다. 이념을 넘어선 공통된 인간애, 그리고 실리에 기반을 둔 상호존중을 강조하는 희망적 서사로 양국의 관계를 바라보고 재정립하면 더 좋았을 것 같다.

‘헤로니모’를 촬영하며 만났던 쿠바 거주 한인들은 그들의 1세대가 한반도 분단 이전인 1905년에 떠났다는 사실을 자주 언급했다. 누구보다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던 그들은 1945년 해방 직후의 남북 분단과 6·25전쟁 발발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고 귀국 길이 막히자 통곡했다. 지금도 쿠바 한인들은 한반도에 남북한이라는 ‘두 개의 코리아’가 있기에 쿠바 정부로부터 공식 한인회의 설립 인가조차 못 받고 있다. ‘문화원’ 형태의 비공식적인 모임이 존재할 뿐이다. 그런데 쿠바의 한인들에게 남북 분단은 이념이 아니라, 파편화된 정체성의 문제이자 불완전한 한민족 디아스포라를 상징한다. 그런 쿠바 한인들의 현실과 관계없이, 쿠바의 한류 열기는 뜨겁다. 촬영차 갔던 2016년 “쿠바 내 가장 유명한 사람은 피델 카스트로, 그 다음이 배우 이민호다” 란 말을 들었다.

‘헤로니모’ 임은조 선생은 생전에 한인 후손들에게 선조들의 이산 경험을 사유해 보길, 한인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자문해보라고 권했다. “조국은 그것을 가질 자격이 있는 사람들의 존엄이자 명예다.” 한국어 교육을 중시한 임은조 선생이 자녀들에게 남긴 시 ‘조국’의 한 구절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수교를 계기로 쿠바 거주 한인 공동체와 그들의 한 많은 디아스포라를 다시 조명하면 좋겠다.

전후석 미국 뉴욕주 변호사·다큐영화 ‘헤로니모’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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