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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유명한 화가가 그렸네? 누가 그렸는지 몰랐던 교과서 그림 '민족기록화' 지금은 어디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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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1호 12면

그 많던 민족기록화의 행방

지난 10일 종영한 KBS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의 클라이맥스는 강감찬이 이끄는 귀주대첩 장면이었다. 컴퓨터그래픽(CG) 등 여러 첨단기술을 동원한 장대한 전투 신이 호평을 받았다. 지금 자라나는 세대는 한국사의 주요 전투를 이렇게 발달한 기술로 제작된 드라마·영화 장면으로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윗세대는 주로 교과서·참고서에 나오는 그림 ‘민족기록화’로 기억한다. 한국인 중에 책에서 민족기록화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민족기록화가 언제 그려졌는지, 누가 그렸는지, 실물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 또한 거의 없다.

단색화 거장 박서보가 이런 스타일 그림을? 박서보의 민족기록화 ‘설법으로 왜장을 감동시킨 사명대사’(1976)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소장 [사진 문소영]

단색화 거장 박서보가 이런 스타일 그림을? 박서보의 민족기록화 ‘설법으로 왜장을 감동시킨 사명대사’(1976)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소장 [사진 문소영]

박서보의 시그너처 스타일 단색화 '묘법 No. 16-78-81'(1981) [국립현대미술관]

박서보의 시그너처 스타일 단색화 '묘법 No. 16-78-81'(1981)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민족기록화’를 실물로 볼 수 있는 곳은 용산 전쟁기념관이다. 1층 로비 거북선 모형을 둘러싼 사면의 벽에 한국사의 주요 전투 장면을 묘사한 거대 그림들이 걸려 있다. 그 중 ‘설법으로 왜장을 감동시킨 사명대사’라는 그림이 있다. 그런데 표지판을 보면 눈을 의심하게 된다. ‘작가: 박서보’. 단색화 즉 모노크롬 추상화의 거장인 박서보(1931~2023)가 이런 사실주의 그림을 그렸다는 것인가?

이뿐만이 아니다. 그 옆에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의 활약을 다룬 ‘조헌 의병장의 금산 전투’가 걸려 있다. 격렬한 전투 장면을 사실주의 화풍으로 역동적으로 묘사한 그림이다. 그런데 작가는 정창섭(1927~2011). 그 역시 단색화 운동의 주요 화가로서, 한지의 물성을 살린 고요한 추상화로 유명하다.

이종상의 민족기록화 '광개토대왕의 영토 확장'(1975)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소장 [사진 문소영]

이종상의 민족기록화 '광개토대왕의 영토 확장'(1975)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소장 [사진 문소영]

전쟁기념관의 로비와 전시실을 두루 돌아다니면 여러 민족기록화를 만나게 되는데, 어린 시절 책으로 접해 친숙한 느낌이 드는 한편, 그 작가의 이름을 보면 깜짝 놀라게 된다. ‘(고려 공민왕 시기) 쌍성 수복’을 그린 이는 입체주의 화가 문학진(1924~2019)이었으며, ‘(백제) 계백 장군의 황산벌 전투’를 그린 화가는 표현주의적 풍경화로 유명한 오승우(1930~2023)였다. 모두 작가의 원래 화풍과는 전혀 다른 사실주의 화풍이다. 5만원권과 5000원권 화폐에 있는 신사임당과 이율곡 영정을 그린 한국화가 이종상(86)의 그림 ‘광개토대왕의 영토 확장’이 그나마 그의 평소 화풍과 괴리가 심하지 않아 충격이 덜하다.

어쩌다가 한국 20세기 주요 화가들이 자신들의 화풍과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또 이 흥미로운 사실이 지금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을까?

작가·연대조차 모르고 소재 불분명 많아

단색화 대가 정창섭이 이런 스타일 그림을? 정창섭의 민족기록화 '조헌 의병장의 금산전투'(1976)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소장 [사진 문소영]

단색화 대가 정창섭이 이런 스타일 그림을? 정창섭의 민족기록화 '조헌 의병장의 금산전투'(1976)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소장 [사진 문소영]

정창섭의 민족기록화 ‘정약용과 저술’ (1979) 경기도 성남시 분당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사진 소장처]

정창섭의 민족기록화 ‘정약용과 저술’ (1979) 경기도 성남시 분당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사진 소장처]

정창섭의 추상화 ‘원중원’(197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사진 소장처]

정창섭의 추상화 ‘원중원’(1970)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사진 소장처]

우선, 이러한 그림들을 웹 데이터베이스로 정리한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말하는 민족기록화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1967년부터 1979년 사이 (박정희 전 대통령 재임 시절) 당대의 유명 화가들이 그린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 경제발전상 등을 주제로 한 대형 회화 작품. 정부의 주도 및 지원에 의해 제작되었다.” 연구원이 링크한 중앙일보 2015년 6월 15일자 기사를 보면, 민족기록화 프로젝트를 주도한 사람은 김종필(JP) 전 국무총리(1926~2018)였음을 알 수 있다.

“1967년 4월 민주공화당 의장이던 JP는 생소한 장르인 민족기록화를 그려보자고 화단에 제안했다. 그때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1000호(5.3×2.9m), 500호(3.3×2.5m) 크기의 초대형 캔버스에 한민족 주요 역사의 장면을 그려 넣자는 기획이었다. 작품의 스케일과 참여 작가의 규모가 당대 최초·최대였다. 박광진 서울교대 교수 등 중진·원로작가 55명이 제작에 참여했다. 그때 한국의 화단은 그런 대형 작품을 제작할 형편이 되지 않았다. 유화물감도 캔버스를 마련하는 것도 어려웠다. (…) 박 교수는 ‘JP가 일본에 사람을 보내 3t 트럭 분량의 미술재료를 사서 배로 싣고 와 화단에 무료로 풀어놨다. 당시 우리 화가들로는 평생 처음 보는 엄청난 것들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용환의 민족기록화 '귀주대첩'(1975)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소장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용환의 민족기록화 '귀주대첩'(1975)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소장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작가들이 압력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김현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참여 작가들의 회고를 보면 당대의 어려운 상황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물질적) 환경이 제공됐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맙고 반가웠다는 이야기가 많다”고 전했다.

김 교수는 또한 JP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성에서 본 전쟁 영웅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고 거의 즉흥적으로 민족기록화 사업을 추진했다고 말했다. JP가 본 그림은 서구에서 ‘역사화(history painting)’라고 불린다. 역사화는 서구 문명의 뿌리인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와 역사, 기독교 성경의 장면을 나타낸 그림으로서, 나중에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1830)처럼 동시대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까지 다루게 되었다. 과거 서구의 아카데미에서는 역사화를 초상화·풍경화·정물화보다 우월한 것으로 여겼다. 화가가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이 있어야 그릴 수 있는 데다 거대한 화폭에 인물 군상이 자연스럽게 얽혀 있는 모습을 그리는 데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20세기 들어 모던아트의 시대가 열리고 관변적·국가기념비적 예술을 경멸하는 시각이 퍼지면서 고전적 역사화는 사라지게 되었다.

서양 역사화(history painting)의 예 1 - 자크 루이 다비드의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1799) 루브르 박물관 소장 [사진 소장처]

서양 역사화(history painting)의 예 1 - 자크 루이 다비드의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1799) 루브르 박물관 소장 [사진 소장처]

서양 역사화의 예 2 - 외젠 들라쿠르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1830) 루브르 박물관 소장 [사진 소장처]

서양 역사화의 예 2 - 외젠 들라쿠르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1830) 루브르 박물관 소장 [사진 소장처]

그런 상황에서 한국에서 뒤늦게 일종의 역사화인 민족기록화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미술평론가 최태만 국민대 교수는 1960~70년대가 “남북한이 동시에 민족주의를 구축, 신화화하던 때였다”고 그의 2006년 논문에서 말한다. 남북한 사회가 각자 정통성을 주장하고 단합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동원했다는 것이다. “1차 민족기록화 사업이 주로 전쟁기록화를 통한 애국심의 고취에 주력했다면, 10월 유신 전후엔 새마을운동, 경제개발 등을 주제로 한 기록화들이 많이 제작되었다. 그런데 산업현장의 풍경을 낭만적이고 낙관적으로 표현한 기록화는 비단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에서도 그려졌고,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란 체제의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 유사성을 공유하고 있다.”

미술사학자 정영목 서울대 명예교수는 1997년 논문에서 “겉으로는 민족정신의 고취를 위한 교육적 차원”이었으나 “그 내면에는 군사적인 행동이라는 물리적인 힘을 빌어 탈취한 정권의 비정통성을, 구국이나 호국의 대의 때문에 군사적인 행동이 어쩔 수 없었다는 (…) 역사를 빌어 합리화시키려 하는 정치심리”로 민족기록화가 탄생했다고 비판했다.

김형구의 민족기록화 '한산대첩'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소장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김형구의 민족기록화 '한산대첩'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소장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군사정권 정당화의 도구’라는 비판과 함께, ‘작가들이 자율적인 정신이 결여된 채 본래 자신의 스타일이 아닌 사실주의 스타일로 그리다 보니 조형적 완성도도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으며 민족기록화는 진지한 미술 비평의 대상에서 아예 제외되었다. 한편 역사학자들 또한 고증이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작품성에 대한 지적이 이미 제작 당시에서부터 있었음을 중앙일보 1976년 11월 29일 기사에서 알 수 있다.

“문공부가 제작한 두번째의 민족기록화 구국위업편이 완성돼 전시 중이다. (…) 이종상·오승윤·손수광·박서보씨 등이 각각 ‘태종무열왕’ ‘동학 구주 전봉준’ ‘충정공 민영환의 자결 순국’ ‘사명당’ 등 20점을 제작했다. 민족기록화가 제작되면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된 것은 고증과 사보에 대한 예술적 승화의 문제. 이번에도 각 작품들은 ‘작가의 이름을 가리면 누구의 작품인지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평론가 이경성 씨 말) 개성을 찾기 힘들었다.”

이러한 비판 속에 민주화 이후 민족기록화는 그 존재가 희미해져 교과서나 역사책에 작가 이름은 언급되지 않은 채 일종의 삽화로만 등장해오고 있을 뿐이다. 그와 함께 그 실물들 중 다수는 “소재가 불분명하고 관리가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미술복원전문가 박유진·이준호의 2019년 논문)

박서보의 민족기록화 '수출 선박'(1973) 소재 불명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서보의 민족기록화 '수출 선박'(1973) 소재 불명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106점 정리해 공개

그나마 2000년대 이후 미술을 ‘순수주의’에서 벗어나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보는 연구가 늘어나면서 민족기록화가 조금씩 연구되고 있다. 또한 2016~17년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민족기록화 중 1973~79년 문예진흥원의 공식 지원을 받아 제작된 106점의 이미지와 작가·재료·소장처 등의 정보를 정리해서 가상미술관으로 공개해 오고 있다. 이중 12점은 경기도 성남시에 위치한 연구원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 외에는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 등에 있고 소재 불명인 작품도 다수이다.

고증 문제와 관련 민족기록화가 지나치게 폄훼된 면도 있다고 김 교수는 말한다. “예를 들어 '충정공 민영환의 자결 순국’의 경우, 실제로는 흰 두루마기를 입고 돌아가셨는데 그림에서는 서구식 예복을 입고 자결한 것으로 나타나 고증이 틀렸다고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 연구원이 발견한 초벌 그림에는 민영환이 두루마기를 입고 자결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즉 화가가 고증에 무지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서양식 예복을 입은 사진으로 유명한) 민영환을 그렇게 묘사하는 게 사람들이 더 쉽게 알아보리라고 판단해서 화가가 창의적으로 새롭게 구성을 한 것이다. 또한 ‘화포와 화약을 제조하는 최무선’의 경우 고문서에 나오는 화약 제조 과정이 그림에 집약되어 잘 묘사되어 있다.”

손수광의 민족기록화 '충정공 민영환의 자결 순국'(1976)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 소장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손수광의 민족기록화 '충정공 민영환의 자결 순국'(1976)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 소장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최대섭의 민족기록화 '최무선의 화포와 화약 제조' 경기도 분당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사진소장처]

최대섭의 민족기록화 '최무선의 화포와 화약 제조' 경기도 분당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사진소장처]

민족기록화가 묻히게 된 데에는 참여 작가들 대다수가 그것을 입에 담지 않기 때문도 있다. 이에 대해 미술사학자 박계리 통일교육원 교수는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민족기록화든 무엇이든간에 아티스트들이 관변적인 어떤 정책에 관여되어 작업한 것을 자랑스러워하지는 않는다.” 즉 일종의 흑역사로 여긴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또 덧붙였다. “‘민족’이라는 말은 시비 걸기 힘든 말이고 그래서 언제나 정책에서 효과적으로 이용되어 왔다. 민족을 위한 프로젝트라는 것에 끌린 아티스트들이 많았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시간적 거리를 두고 보기 때문에 냉정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당대의 참여 작가들이 민족기록화의 (정권 정당화) 맥락을 모두 이해했는지 알 수 없다. 그걸 잘 알고 적극적으로 동조한 이도 있겠지만, 어떤 이들은 부분적으로 이해했더라도 또한 민족을 위한 것으로 자기 스스로를 합리화했을 것이다. 각자의 상황을 개별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박 교수는 또한 민족기록화를 예술작품으로 볼 수도 없다는 견해에 반대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 작품들은 잘 보존해야 하며, 또 엄연히 미술작품이므로 국립현대미술관 같은 곳에서 소장하면서 다양한 담론을 펼쳐야 한다.”

김 교수는 말한다. “민족기록화는 각 그림이  과거의 역사를 얼마나 정확하게 묘사했느냐의 관점뿐만 아니라 기록화가 제작된 시절에 우리가 어떤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민족기록화가 어떻게 드러내는가의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즉 민족기록화 그 자체가 우리에게 역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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