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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의 리믹싱 셰익스피어] 당신의 아름다움은 아이 안에서 시 안에서 두 번 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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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는 10음절짜리 행 14개(4-4-4-2 구조)가 규칙적 라임(각운)과 함께 움직이는 정형시다. 총 154편 중 빼어난 것을 고르고, 동시대적 사운드를 입혀 새로 번역하면서, 지금-여기의 맥락 속에서 읽는다.

내 시구가 그대의 가장 고귀한 자질로 채워진다면다
다가올 시대의 사람 중 누가 그 구절을 믿겠는가?
그러나 하늘은 알지, 내 문장 한낱 무덤일 뿐임을,
당신의 생명을 가리고 그 미덕의 반도 못 보여주니.  
내가 그대 눈의 아름다움에 관해 쓴다면, 그리고  
신선한 운문으로 그대의 모든 우아함을 헤아린다면  
다가올 세대는 말하겠지, “시인이 거짓말을 하는군.  
그만한 천상의 손길이 지상의 얼굴에 닿았을 리가.”
그러니 세월 흐르고 노랗게 색 바랜 내 원고들은  
조롱받겠지, 말은 많아도 진실은 적은 노인처럼.
또 그대 누려 마땅한 찬미들은 한 시인의 광기로
치부되겠지, 한물간 노래에나 있는 시적 과장처럼.
그러나 그런 때에 그대의 아이가 있다면 당신은  
두 번째로 사는 것, 아이 안에서 또 내 시 안에서.  
소네트 17 (신형철 옮김)

안 좋은 소식은 우리가 ‘출산 소네트’의 세계를 아직 떠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좋은 소식은 이것이 17번, 즉 출산 소네트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것이다. 연재 1회차에서 출산 소네트는 1번으로 충분하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2회차에서 또 12번을 읽은 것은 그 작품부터 화자인 ‘나’의 목소리가 전면에 나오기 시작하기 때문이었다. 오늘 17번까지 읽는 이유는, 15번에서 추가되고 17번에서 또렷해지며 이후로는 되돌려지지 않는, 또 하나의 변화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시인’으로서의 자신을 의식하고 또 드러낸다. 이런 구도가 성립된 것이다. ‘당신은 아이를 낳지 않는다, 내가 당신에게 아이 낳기를 권한다, 그런데 나는 시인이기도 하다.’

출산과 시, 아름다움 복제 공통점
‘나’가 ‘당신’(아름다운 청년)에게 아이 낳기를 권하는 중인 이유는 당연히 출산율 때문이 아니다. 그이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복제되어 번성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시인이 하는 일도 비슷하지 않은가. 아름다움의 ‘복제’라는 측면에선 말이다. 다만 그것이 ‘번성’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하긴 어려울 것이다. 자식과는 달라서 시라는 복제물은 그 스스로 결혼과 출산을 향해 나아갈 순 없으니까. 그러나 대상을 ‘기억’하게 하는 힘에 대해서라면 시는 나름의 역량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출산 권유 기조를 유지하는 동시에 시인으로서 자신이 할 일에 대해서도 자각하기 시작한다.

마지막 '출산 소네트' 17번 노골적
"내 시 진실 적고 과장" 엄살 떨다
얼핏 자식과 대등한 위치로 격상
이후 '창조주-시인'의 자신감 비춰

그런데 본격적으로 시작도 하기 전에 시무룩해져서는 한참 볼멘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게 이 17번이다. 두 가지 한계를 지레 감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시인의 역부족. 내 실력은 당신의 생명을 오히려 가릴 뿐이고, 그 미덕을 절반도 그려내지 못한다. 화자의 자기 평가는 냉정해서 제 글을 “무덤”에 비유한다. 누군가 살았다는 증거이긴 하나 그 자체로는 어떤 생명력도 없는 그런 글. 둘째, 독자의 불신. 내가 용케 써낸다고 한들, 사람들이 이 시가 진실임을 믿어줄까? 시인의(어쩌면 조물주의) 솜씨가 “천상의 손길”(heavenly touches)처럼 보일수록 그것이 실제 “지상의 얼굴(earthly faces)”과 연결돼 있다고 믿기는 어려워진다는 것.

시를 ‘기억의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는 시인의 기획은 실패할 것인가. 화자는 미래로 가서 제 작품의 운명을 미리 본다. 낡아 노래진 내 원고는 그 형태만으로도 쓸쓸한 노인 같다. 게다가 사람들이 믿지 못할 그 내용 때문에도 그리 대접받을 것이다. “말은 많아도 진실은 적은” 그런 노인 같은 시, 진실은커녕 오로지 “광기”와 “과장”으로 가득하다고 여겨질 그런 시. 그래서 절박한 마음으로 화자는, 다시 한번, 그리스비극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갑자기 강림하는 신이라도 되는 듯, “그대의 아이”가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면 당신은 두 번째의 삶을 두 개의 트랙 위에서 살게 된다고. (당신만큼 아름다울) 자식을 통해, 또 (자식 덕분에 진실성을 인정받을) 내 작품을 통해.

이렇게 끝나는 시의 여운을 곱씹다 보면 묘한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자식이 있어야 작품도 있다는 말이긴 하되, “아이 안에서 또 내 시 안에서”라는 대미에 이르면 자식과 작품은 얼핏 대등해 보이지 않는가. 시 전반의 엄살과는 다른 당당함이 느껴진다고 할까. 이건 어쩐지 내 작품을 위해서 네 자식이 필요하다는 식일지도 모르겠단 생각마저 든다. 아닌 게 아니라 마지막 구절이 애매하다는 주석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판본에 따라서 쉼표 위치가 “당신은 두 번째로 사는 것 아이 안에서, 또 내 시 안에서”로 된 것도 있어서다. 마치 “두 번째의 삶은 아이를 통해, 세 번째의 삶은 시를 통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경우엔 작품의 위상이 더 당당해진다.

그림=김지윤 기자

그림=김지윤 기자

겸손함은 자신감의 땅에서 자란다
한 작품에는 겉으로 드러나 있는 목소리와 충돌하는 다른 목소리가 언제나 있어서 그걸 드러내기만 하면 외관상의 일관성이 무너지고 만다는 비평 이론도 있다. 그 흉내를 내려는 건 아니지만,  이 시에는 이후에 분출될 창조주-시인의 야심이 겸손을 가장한 채 잠재돼 있다는 주장을 고집하고 싶다. 때로 겸손함은 자신감의 땅에서 자란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게다가 ‘당신’이 끝내 아이를 낳지 않을 거라는 것쯤은 이제 시인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당신’의 두 번째 삶이 가능해질 공간은 바로 여기, 셰익스피어의 천재적 재능이라는 영토뿐이다. 소네트는 지금부터 다시 시작한다. 이제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 당신의 아이를 낳을 것이다.

Who will believe my verse in time to come
If it were filled with your most high deserts?
Though yet, heaven knows, it is but as a tomb
Which hides your life and shows not half your parts.
If I could write the beauty of your eyes
And in fresh numbers number all your graces,
The age to come would say “This poet lies;
Such heavenly touches ne’er touched earthly faces.”
So should my papers, yellowed with their age,
Be scorned, like old men of less truth than tongue,
And your true rights be termed a poet’s rage
And stretchèd meter of an antique song.
But were some child of yours alive that time,
You should live twice, in it and in my rhyme.

신형철 문학평론가

신형철 문학평론가

◇신형철=2005년 계간 문학동네에 글을 쓰며 비평활동을 시작했다. 『인생의 역사』 『몰락의 에티카』 등을 썼다. 2022년 가을부터 서울대 영어영문학과(비교문학 협동과정)에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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