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1960년대부터 국가적 문제였던 의대 정원 갈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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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반복되는 의·정 대립의 역사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조선 시대 가장 인기 있었던 과목은 문·사·철이었다. 유학의 고전과 한·당대(漢唐代) 시를 익히는 것은 사대부가 되기 위한 기본이었다. 근대 산업화의 기반이 되는 실용 학문이나 과학보다는 문학과 역사, 철학을 논했던 조선 시대의 가장 중요한 학문은 근대 산업화에 필요했던 상업, 경제학 등 실용학문이나 과학기술 등과는 거리가 멀었다.

지위가 상승한 율사와 역관

개항을 하고, 근대 자본주의 세계에 편입되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부각된 학문은 법과 외국어였다. 만국공법이라는 국제법이 소개되었다. 유교적 세계관에 근거했던 과거와는 다른 국제질서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근대적 법체계가 도입되면서 새로운 법을 만들고 다룰 줄 아는 전문가들이 필요해졌다.

근대 세계 들어서면서 의학 수요 폭발적 증가하고 의사 지위 향상
100년 전 경성제국대학 설립 때 법학부와 의학부가 가장 주목받아
70년대 초엔 “제대로 된 처우 못 받는다”는 의사들의 선언 나오기도
국민 생명 직결된 병원 제대로 운영 안 되는 것은 국가적 위기 상황

의대 정원 문제는 국가와 의사 직역 사이에서 역사적으로 반복되어 온 갈등의 주제였다. 지난 3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의대정원 증원 반대 전국 의사 총궐기 대회. [뉴스1]

의대 정원 문제는 국가와 의사 직역 사이에서 역사적으로 반복되어 온 갈등의 주제였다. 지난 3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의대정원 증원 반대 전국 의사 총궐기 대회. [뉴스1]

개항 이후 개항장과 조차지가 생기면서 다양한 외국어를 능숙하게 할 수 있는 통역자의 수요가 증가했다. 사신이나 무역에 종사하는 소수인에게만 필요했던 중국어와 일본어뿐만 아니라 영어와 독일어, 그리고 러시아어까지 통역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 필요했다. 조선보다 강했던 열강들의 문명을 받아들이고, 그들과의 관계를 적절하게 만들기 위해 통역은 너무나 중요했다.

과거 법과 통역을 하는 사람들은 중인이었지만, 이제 근대에 들어서면서 법과 외국어는 국가적으로 문·사·철보다 더 중요한 분야가 된 것이다. 율사를 양성하고 외국어를 가르치는 학교가 설립되었고, 해외에서 공부하는 자제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근대 과학으로서의 의학 등장

이와 함께 주목을 받은 학문은 상공업과 의학이었다. 농업이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기에 선진 농법을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였지만, 문·사·철이나 농업보다도 천대시 되었던 상공업의 발전이 필요한 상황에서 상업과 함께 경제학이 도입되었다.

근대 의학의 소개는 의약 전문가에 대한 사회적 수요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시켰다. 의사 역시 율사나 역관과 마찬가지로 조선 시대에는 최고의 직업이 될 수 없었다. ‘허준’이나 ‘대장금’ 같은 드라마, 그리고 ‘올빼미’와 같은 역사 배경 영화들은 전통시대 의관들의 지위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근대 의학은 철학과 과학 사이에 위치했던 전근대적 의술을 자연과학이라는 새로운 영역 속으로 갖고 들어왔다. 삶과 죽음이 분리되지 않았던 시대에서 이제 근대의학 수혜자들의 평균수명과 기대수명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전근대 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병에 대한 치료가 이루어지면서, 이제 환갑잔치와 진갑잔치가 당연한 행사가 되었다.

100년 전 설립된 경성제국대학

시대적 변화는 가장 인기 있는 직업을 바꾸어 놓았다. 성균관에 입학하고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에 오르는 것이 최고의 직업이라 여겨졌던 시대에서 이제 율사나 의사가 되는 길이 사회적 사다리의 제일 상층에 위치하기 시작했다. 100년 전인 1924년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될 때 가장 주목받았던 학과는 법학부와 의학부였다.

해방 이후 산업화의 과정에서 국민학생들에게 장래의 직업을 물으면 장군과 과학자가 대부분을 차지했던 시기가 있었다. 미래 직업란에 의사나 판검사를 적는 학생들은 많지 않았다. 위인전에는 이순신 장군이 빠지지 않았고, 아인슈타인과 퀴리 부인을 모르는 청소년이 없었다. 은행의 문턱이 높았던 1970년대에는 은행원의 인기가 꽤 높았다.

중진국을 넘어서면서 나타난 또 다른 특징은 기업가가 인기 직업군이 되었다는 점이다. 하버드대학 에컬트 교수는 1990년대 이전 자본주의 국가인 한국에서 기업가들이 인기가 없고, 부정부패의 상징으로만 평가받는 상황이 한국적 특수성을 보여준다고 지적했지만, 1997년 금융위기 이후 이런 상황에는 큰 변화가 나타났다. 기업가들이 선망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의대와 법대의 변함없는 인기

이러한 변화가 있었지만, 의사나 율사처럼 근대 이후 시대적 변화를 불문하고 지속적 인기를 누린 직업이 없다. 대학 입학고사 수석이 의대나 법대가 아닌 순수학문을 지원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입학 합격선은 의대와 법대가 항상 최상위에 위치했다. 1980년대 이후 최고 인기 미국 드라마는 로스쿨과 병원을 다룬 드라마들이었다.

물론 로스쿨 제도가 생기면서 학부에서 법대가 사라졌지만, 이제 로스쿨은 모든 학부나 학과의 졸업생들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었다. 의과전문대학원이 설립되어 한때 로스쿨과 같은 역할을 했지만, 의대는 다시 학부로 돌아왔다. 여기에 더해 의대와 법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학부 전공과 관계없이 로스쿨에 입학할 수 있고, 로스쿨 이전의 사법시험은 전공과 관계없이 누구나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지 않아도 사법시험 합격이 가능했다.

의사는 다르다. 의과대학이나 의학전문대학원을 나오지 않고서는 의사 시험을 볼 수 없다. 이러다 보니 의대는 대학입시의 최대 목표가 되었으니 한국 사회 최고 인재들이 모여 있는 곳이 의대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건강을 책임지는 직업에 인재들이 모인다는데 누가 반대하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자제를 의대에 보내고 싶은 학부모의 입장, 보다 나은 의료 서비스를 받고 싶은 국민의 입장을 고려하면, 의대 정원 문제는 이미 1960년대부터 국가적 문제가 되었다.

의대 정원, 그리고 의사 선언

1969년 정부는 의대 정원 증원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1974년에는 정부가 임의로 올린 정원 50명을 다시 줄여달라는 의대의 청원이 있었다. 1993년 이후에는 의대 정원을 둘러싸고 교육부와 보건사회부 사이의 갈등이 외화되었고, 이 시기 새로 인가한 의과대학이 이후에 부실대학으로 문을 닫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문제는 여기에만 있지 않았다. 1971년 7월 전문의들이 의사선언을 발표했다. 제대로 된 처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전문의들의 현실에 대한 사회적 선언이었다. 정부와 병원은 이러한 처우를 개선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지금의 위기 상황에서 36시간 연속 근무 얘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당시와 비교해서 지금 얼마나 개선되었는지 궁금하다.

지금 의사들이 병원을 떠나고 있다. 이로 인해 국민의 생명과 직결된 병원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으니 이는 국가적 위기 상황이다. 국민의 건강을 지켜줄 대체자들이 없기 때문이다. 이유는 갑작스러운 의대 정원의 증가다. 언론의 보도처럼 이러한 상황의 원인이 의사들의 특권의식과 이기주의에 있다면 이들은 마땅히 비난받아야 한다.

그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그런데 병원을 떠난 이들은 교수가 아니라 전공의들이다. 의대 6년 과정을 마치고 전공의까지 되어 이제 대학병원의 교수 겸 의사가 되거나 개업을 할 위치에 가기 직전의 사람들이다. 이들이 이런 여론을 모르고 병원을 떠났을까? 여론을 예측하지 못했다면, 의대 학부 교육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들은 그냥 열쇠 3개만을 원하는 이기주의자들일 뿐일까?

병원 문제는 단지 의사와 환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의료보험의 문제가 있고, 병원이라는 기관의 문제가 있다. 그러기에 한국의 의학 수준은 세계 최고이지만, 요리하다가 손을 베어도 종합병원 응급실 외에는 갈 곳이 없는 게 오늘 한국의 상황이다. 대학의 조교들이 그렇듯이 병원에서 모든 궂은일을 다 하면서 제대로 된 임금이나 대우도 받지 못하는 것이 전공의들이다.

언론은 그들의 목소리를 보도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대 정원 증원을 신청한 학교의 입장, 그리고 이들을 옹호하면서 학교를 사직한 의대 교수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이들은 그냥 이기주의자이기에 희생되면 그만인가? 누가 이들을 병원으로부터 사직하도록 만들었는가? 수업시간과 대학신문사에서 만났던 의대 학생들, 그리고 환자로서 병원에서 만났던 전공의들은 지금 언론에 보도되는 그들과는 다른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의 목소리를 더 듣고 싶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