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식 입문 52년, 다시 짜장면…오늘도 웍을 잡고 공부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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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0호 21면

왕사부의 중식만담 〈끝〉

짜장면은 소스와 섞은 뒤 잠시 놔뒀다 먹으면 더 맛있다. 박종근 기자

짜장면은 소스와 섞은 뒤 잠시 놔뒀다 먹으면 더 맛있다. 박종근 기자

서울 명동을 돌아보다가 놀랐다. 그 많던 짜장면 가게는 다 어디 갔을까. 한창때는 골목마다 두세 곳이 있었는데 말이다. 코로나19 타격이 컸다. 50년을 이어온 유명 비빔밥집도 문을 닫았으니 작은 가게들이야 오죽하랴. 중국대사관 앞 화상거리는 여전하고 마라탕 가게는 늘어나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자장몐(炸醬麵)은 중국 음식이다. 볶은(炸) 장(醬)을 면에 얹어 낸다. 그냥 먹으면 짜니 갖가지 채소를 고명으로 얹는다. 이를 젓가락으로 비비면 그만이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대를 따라온 상인, 1883년 인천 개항 뒤 들어온 노동자와 농민들을 따라 중국 음식도 들어왔다. 1889년 개통한 경인 철도 건설은 화교 노동자들 힘이 컸다. 이들은 밥 때가 되면 불을 피워 고향 음식 자장몐을 해 먹었다. 그러다가 재료들을 한꺼번에 넣고 기름에 볶고 튀기며 만든 음식이 짜장면으로 발전했다. 자장몐은 대만과 일본으로도 흘러들었지만 한국에서 유독 독특한 음식이 됐다.

값 통제에 삼선간짜장 만들어 값 올리기도

1970년대만 해도 식당 차림표에는 작장면이라고 썼다. 한국식 발음 짜장면은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자장몐과 짜장면은 형제지만 다르다. 중국 사람이 짜장면을 처음 먹으면 ‘이 달고 기름지고 고소한 음식은 뭐야 볶음국수잖아’ 할 테고, 한국인이 자장몐을 만나면 ‘아이고 왜 이리 짜, 이거 그냥 된장 비빔국수구먼’ 할 테다.

이름을 둘러싼 논쟁도 있었다. 국립국어원은 된소리 발음의 짜장면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장면이 얻다 대고’ ‘그러면 짬뽕도 잠봉이겠네’ 하며 반발했다. 결국 2011년 8월 31일 둘 다 표준어가 됐지만 자장면파는 몰락했다.

1948년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며 화교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길이 막혔다. 차별 속에서 살길을 찾아야 했다. 땅도 사지 못하다가 1968년에야 50평 이하 영업용 토지 소유가 가능해졌다. 가족끼리 할 수 있는 음식점을 많이 열게 된 이유다. 면 뽑는 기술이 있으면 대개 요릿집을, 아니면 찐빵(만두)이나 호떡집을 열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웬만한 시골에도 중화 빵집이 있었다.

1960년대는 짜장면 확산기였다. 한국전쟁 뒤 미국이 무상 원조한 밀가루가 배경이었다. 쌀이 부족한 시절이라 정부는 분식을 강제했다. 1969년 2월 1일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을 분식의 날로 정했다. 식당에서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쌀밥을 팔지 못했다. 이를 어기면 최고 6개월 영업정지를 내렸다. 포상금 5000원을 노리는 밀고자도 있었다. 분식의 날이면 중국집들은 미어터졌다. 직원들은 화장실 갈 틈도 없었다. 1970년대에 등장한 알루미늄 배달통과 오토바이 덕에 짜장면은 날개를 달았다.

1997년에 히트한 ‘짜장면 시키신 분~’ 휴대전화 TV 광고를 기억하는 분들 많겠다. 마라도에서 주문해도 배달한다는 내용인데 그만큼 짜장면은 배달음식의 대명사가 됐다.

외식 왕좌에 올랐지만, 값은 올릴 수 없었다. 정부가 가격을 틀어쥐었기 때문이다. 틀어막으면 옆구리가 터지는 법, 재료 몇 가지를 더 넣어 값을 올린 삼선간짜장·삼선짬뽕이 탄생했다. 1970년도 차림표를 보면 작장 80원, 간작장 120원. 삼선작장 180원, 초마면 120원이다. 작장은 짜장면이고 초마면은 하얀 짬뽕을 말한다. 이때 콜라 값이 80원이었다.

얼마 전 넷플릭스가 공개한 ‘짜장면 랩소디’에 나도 출연해 면장을 빚고 짜장을 볶았다. 내용 중에 한국 사람들은 하루 짜장면 600만 그릇을 먹는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 정도면 짜장면 종주국 아닌가. 나 어릴 때만 해도 화교들은 집집이 면장을 담갔다. 밀가루를 넣는 점 외에는 한국 된장 만드는 방법과 같다. 시판 춘장이 검은 이유는 면장에 캐러멜 색소를 넣기 때문이다. 초창기에는 양파가 비싸 넣지 않았다. 채 썰어 데친 무말랭이, 고구마, 감자, 늙은 호박처럼 계절마다 재료가 조금씩 달라졌다.

두 가지 잊지 못할 기억이 있다. 집에서 중국식 자장몐을 먹던 나는 일곱 살 때 한국 짜장면을 처음 맛봤다. 명절에 부모님을 따라 충주 외삼촌 댁에 가는 길이었다. 전주에서 아침에 호남선 상행열차를 타면 점심 무렵 조치원에 내렸다. 충북선으로 갈아타기 전에 아버지가 아는 식당에 들어갔다. 곧 아찔한 향을 풍기는 음식이 나왔는데 짜장면이었다. 그 맛에 빠져 해마다 충주 가는 날을 기다렸다.

당구장에서 먹는 맛은 더 환상적

중국식 자장몐. 갖가지 채소와 면장을 얹어 비벼 먹는다. 박종근 기자

중국식 자장몐. 갖가지 채소와 면장을 얹어 비벼 먹는다. 박종근 기자

또 하나는 1970년대 경마장 앞 성수원에서 일할 때였다. 이때는 경마장이 뚝섬에 있었다. 배달을 금하던 경내를 경비과장을 구워삶아 뚫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빈 그릇을 아무 데나 던져놓아 환경미화원들 불만이 쏟아졌다. 간신히 연 문이 다시 닫힐까봐 걱정하다가 꾀를 냈다. 짜장면, 단무지 5조각, 나무젓가락을 한 세트로 만들었다. 관람석 의자 밑에 쏙 들어갈 크기였다. 경주가 끝나면 빈 그릇만 수거하면 됐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규격 음식 배달의 원조인 셈이다.

당구장에서 먹는 짜장면 맛은 환상이다. 게임을 하는 동안 면이 소스를 흡수해 적당히 간이 배니 일리가 있지만 사실은 친구들 때문 아닐까. 누군가와 둘러앉아 먹는 짜장면은 무조건 맛있다. 그 시절 짜장면 맛이 그리운 시절이다. 짜장면 교도를 자처하는 요리사 박찬일은 그의 책 『짜장면: 곱빼기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에서 말한다. ‘짜장면은 입-식도-위로 가는 게 아닌 것 같다. 입-뇌로 가는 듯하다. 먹으면 곧바로 행복해졌다. 이제는 행복보다 우울해진다… 짜장면 맛이 변해서.’

면이 전과 같지 않고, 잘 볶은 소스에서 퍼지는 구수한 향이 떨어지고, 짜장은 MSG로 혀를 순간만 속여 달고 개운하지 못하고, 그렇게 하향 평준화한 짜장면이 못마땅하다는 말이다.

중식 입문 52년, 나는 요리 세계를 섭렵하고 짜장면으로 돌아왔다. 누구나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소박한 짜장면을 내놓고 싶어서다. 오늘도 나는 웍을 잡고 공부한다. 짜장면.

※정리: 안충기 기자

왕육성 중식당 ‘진진’ 셰프. 화교 2세로 50년 업력을 가진 중식 백전노장. 인생 1막을 마치고 소일 삼아 낸 서울 서교동의 작은 중식당 ‘진진’이 2016년 미쉐린 가이드 별을 받으며 인생 2막이 다시 바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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