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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운찬 칼럼

총선 정국, 대한민국의 장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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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

올해는 무려 60여 국가에서 선거가 치러진다. 모두 25억 명의 주민들이 참정권을 행사한다니, ‘초특급 선거의 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마오쩌둥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했지만, 에이브러햄 링컨의 말대로 ‘투표용지(ballot)는 총알(bullet)보다 강력한’ 힘으로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북한처럼 일당독재가 세습화된 정권까지 투표라는 요식 행위를 거치는 이유다.

압축성장 따른 양극화 문제 심각
균형성장 틀 마련이 정치의 임무
‘모든 사람들을 위한 번영’이 절실
시대정신 부응할 정치인 선택을

근대적 선거제도가 등장한 지 20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인류의 절반가량은 전근대적 정치체제에서 신음하고 있다. 민의 수렴이 제도로 정착된 민주국가에서도 정당정치와 대의정치는 새로운 도전을 받고 있다. 대통령 제도를 처음 선보인 미국에서조차 재임 중 행적이 낙제점을 받아 낙선한 것도 모자라 갖가지 위법행위로 기소된 트럼프가 다시 공화당 경선에서 선두를 달리는 기현상이 대의 민주주의의 위기를 시사한다.

인류를 번영과 평화로 이끌던 글로벌 리더들이 국제무대에서 사라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나 이스라엘의 하마스 공격을 종식할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다. 다자 간의 협력 메커니즘이 퇴조하면서 냉전 구도가 부활하여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국가와 러시아·중국 중심의 전체주의 세력 간의 패권 경쟁은 언제 열전(熱戰)으로 발전할지 모르는 위급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총선을 앞둔 우리나라 상황도 심각하다. 산업화의 성공이 민주화로 이어져 1987년 개헌 이래 평화적 정권교체를 거듭하고 있으나 제도적 민주화가 의식의 민주화로 승화되지 못했다. 김정은이 대한민국을 ‘제1의 적대국’이니 ‘불변의 주적’이니 운운하며 침략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판국에도 국론은 극도로 분열되어 있다. 정치는 극단적 주장을 배격하고 모든 가능성 속에서 합리적 해법을 찾아가는 과정인데도 여야는 대화조차 거부하고 있다.

사회 내부에는 더 큰 암초들이 박혀있다. 압축성장에 성공하여 외형적으로는 단군 이래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지만, 불균형성장 전략이 초래한 대·중·소 기업 간의 임금 격차와 계층 간의 양극화는 우리 사회에 짙게 드리워진 그림자다. 최근 기승을 부리는 혐오 범죄나 ‘묻지 마’ 폭행은 단순한 개인의 일탈을 넘어 사회적 불만의 분출임을 인식해야 한다. 몇십억이 넘는 아파트가 현찰로 거래되는 것이 ‘그들만의 잔치’임을 너무 일찍 깨달아 버린 젊은 세대들에게 세계 최고를 넘나드는 자살률과 최저 수준에 달한 저출생은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별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지표일 뿐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 사회가 지혜를 모아야 한다. 국가의 운명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풀 것인가? 우리 모두가 양극화의 심각성을 직시하고 이를 해결해야 한다. 정책적으로 그들의 삶을 지원하고 정치적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균형 있게 반영하고 제도적으로 균형성장의 모멘텀을 마련해야 한다. 미래 세대에게 의사나 변호사가 되지 않아도 ‘인생의 낙오자’가 되는 것이 아님을 현실 사회에서 구현해야 한다. 다른 일을 해도 충분한 성취감과 존경을 받을 수 있고, 집도 사고 아이도 낳아 기르고 노후도 즐길 수 있는 경제적 보상이 뒤따르도록 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이런 정책은 세제 개편 등으로 기득권을 재배분해야 그 성과를 달성할 수 있다. 기득권 계층에게 이런 정책이 환영받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득권 계층은 눈앞의 득실만 따질 게 아니라 장기적 안목으로 과감하게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파탄 날 수도 있다.

노령화의 불편한 진실 중 하나는 생산의 주체인 젊은 세대가 정치적 주도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은퇴 세대인 노년층이 유권자의 다수를 차지하여 정치적 주도권을 가지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젊은 세대의 염원은 정치적으로 묻혀버리기 십상이고, 정치적 목소리를 상실한 계층에게 정책의 혜택이 강화될 리 없는 우울한 현실이 고착화된다.

이런 점에서 양극화의 해소는 젊은 세대, 소외된 세대의 정치적 목소리를 균형 있게 확보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 정책이 일부 계층만의 잔치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번영’이라는 올바른 좌표를 회복할 수 있다. 그리고 노년층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도, 부자들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도 지속가능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이번 4월 총선은 그런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 되어야 한다. 어떤 정치집단이 조금이라도 더 양극화 해소를 강조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정책을 공약으로 내걸며, 실제로 이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을 후보로 공천하여 실천적 의지를 보이는지를 살펴야 한다. 4월 총선에서 시대정신에 부응하는 정치,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유권자의 권리요 의무다.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