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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인혜의 미술로 한걸음

김종학, 사람도 꽃이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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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김인혜 미술사가

김인혜 미술사가

‘설악산의 화가’ 김종학을 아는가? 설악산에서 그린 그의 꽃 그림은 1990년대 한국 미술시장의 급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한때 서울 강남 부잣집에 김종학의 꽃 그림이 안 걸린 집이 없다는 말이 나돌았다. 그의 꽃 그림은 화려하고 알록달록해서 집 안에 걸어두면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김종학의 꽃 그림이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꽃만 그린 것은 아니었다. 그의 작품의 스펙트럼은 놀라울 정도로 넓고 다양했다. 이우환, 박서보, 김창열 등 이른바 단색화 작가들과 대학 시절부터 친구였던 그는, 처음에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순수한 ‘추상화’를 그렸다. 일본에서 개인전을 열었을 때는 상자 두 개에 흰 천을 감아 빨래 짜듯 비틀어 바닥에 놓은 설치미술을 발표하기도 했다. 1968년에는 일본에서 판화를 본격 공부했고, 1977년에는 미국에서 세계의 새로운 미술 경향을 조사하기도 했다. 이때까지 그는 좋게 말해 ‘다양한 공부’를 했고, 나쁘게 말해 ‘방황’을 했다. 그게 예술가에게는 같은 것을 의미하지만.

‘설악산의 화가’ 김종학 전시회
야생화 그리며 생의 의미 찾아
평생 그린 미발표 인물화 공개
꽃보다 더 각양각색의 사람들

김종학, 무제, 1978, 한지에 수채. ⓒ김종학

김종학, 무제, 1978, 한지에 수채. ⓒ김종학

서울, 도쿄, 뉴욕을 방랑하던 그가 설악산 깊은 숲속에 정착하게 된 것은 의외의 계기로 찾아왔다. 1979년 홀로 뉴욕을 돌아다니던 그에게 이혼 통보가 날아온 것이다. 급히 귀국한 그는 짐을 싸서 나와 친형의 도움으로 설악산 밑에 은거했다. 신의주의 부잣집 막내로 태어나 경기고, 서울대를 나온 엘리트 출신의 그에게, 이 상황은 하늘이 무너지는 시련이었다. 그는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아찔한 속도로 내리꽂히는 폭포수를 향해 뛰어들 생각도 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자식에게 그림 100점은 남기고 죽어야겠다.’라는 생각이 그를 살렸다. 사람에게는 사랑할 대상이 하나라도 있으면 살아갈 수 있는 법이다.

그러고 보니, 화가에게 사랑할 대상이 더 많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깜깜한 밤 달빛을 받으며 절벽 위에 핀 노란 달맞이꽃이었다. 사람들이 못생긴 여자를 비유할 때 들먹이는 ‘호박꽃’도 실제로 보면 수수하고 소박한 맛이 아름다웠다. 할미꽃, 부처꽃, 며느리밥풀꽃 등 이름도 정겨운 야생화가 사계절 내내 설악산에는 지천이었다. 그는 총 135종의 야생화 목록을 직접 만들었는데, 이것은 온 산을 헤매며 화가가 발견하고 관찰한 기록이었다.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연약한 들꽃을 훨씬 더 크게 화면의 주인공으로 삼고, 그것들이 조화롭게 어울리도록 화면을 재구성하고 재배열했다. 꽃은 더 예쁘고 덜 예쁜 것의 구분이 없다. 다만 각각 다를 뿐. 그리고 이들은 그 다름으로 인해 더욱 귀한 존재들이다.

보잘것없는 야생화는 어찌 보면 김종학 자신이다. 어엿이 존재하지만, 사람들이 쉬 눈길을 주지 않는 작은 꽃. 야생의 환경에서 특별한 보호를 받지도 못하지만 어떻게든 살아남은 생명. 이들의 존재는 화가에게 살아갈 이유를 증명해주는 징표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 그는 살기 위해 야생화를 그리고 또 그렸다. 관객들은 이러한 배경을 알든 모르든, 사람 살린 야생화 그림을 벽에 걸어두고 생기(生氣)를 느낀 것이다.

그런데, 김종학이 궁극적으로 더 관심을 갖고 애정을 주고 싶었던 대상은 꽃보다 ‘사람’이었다. 그것이 현실 생활에서 도무지 쉽지 않았기에, 꽃에다가 애정을 투사했을 뿐. 사람이야말로 꽃보다 더 각양각색인 존재 아닌가. 흥미롭고, 어렵고, 복잡한 대상이다. 이들을 만나고 관찰하고 기억하고 그리는 일은 화가에게 평생의 숙제였고, 일종의 습관이었다.

그래서 김종학은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사람 그림을 그려왔다. 지하철에서 마주친 남자, 곰보 얼굴의 기사 아저씨, 친한 친구들, 가족, 그리고 화가 자신 할 것 없이 그가 평생 만나고 헤어진 모든 존재가 작품의 대상이었다. 특별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이, 모두가 평등하고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다. 그는 마치 야생화를 관찰할 때와 마찬가지로, 이들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온갖 표정을 기억한 후, 틈틈이 기억을 떠올려 그리고 또 그렸다. 눈에 띄는 아무 종이에나, 신문지나 포장지 위에도, 도자기나 목기에도.

김종학의 인물화 총 143점이 3월 6일부터 현대화랑에서 전시된다. 꽃 그림은 잘 팔려서 전시도 많이 됐지만, 도무지 팔릴 일이 없었던 사람 그림은 대부분 이번에 처음 공개된다. 87세의 노화가는 평생 그가 만나고 그리워하고 미워하고 용서한 이 모든 이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고 싶었단다. “사람도 꽃이다.” 전시는 4월 7일까지.

김인혜 미술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