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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접수한 벽안의 사무라이, 섞여야 아름답구나 [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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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8호 18면

[영감의 원천] ‘자포니즘’의 부활

넷플릭스에 지난 11월부터 독특한 애니메이션 시리즈 ‘푸른 눈의 사무라이(이하 ‘푸른 눈’)’가 올라와 있다. 17세기 에도시대의 일본을 배경으로 한 검객 활극인데, 세계 최대 영화정보 사이트 IMDb에서 평점 10점 만점에 8.8점으로 역대 모든 TV시리즈 상위 100선에 속할 만큼 호평을 받았다. 또 세계적인 영화비평 사이트 로튼토마토의 신선도 지수가 100%에 달한다. 덕분에 이 시리즈는 곧바로 시즌2 제작이 확정되었다.

모네, 기모노 입은 부인 화폭에 담아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시리즈 ‘푸른 눈의 사무라이’(2023)의 한 장면. [사진 넷플릭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시리즈 ‘푸른 눈의 사무라이’(2023)의 한 장면. [사진 넷플릭스]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목판화 ‘이노카시라 연못 변재천 사당의 설경’(1843). [사진 미네아폴리스 미술관]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목판화 ‘이노카시라 연못 변재천 사당의 설경’(1843). [사진 미네아폴리스 미술관]

호평의 비결은 무엇일까? 일단 액션의 묘사가 유려하고 사실적이면서 만화적 과장을 살짝 더해 박진감이 넘친다. 19금 애니답게 폭력과 성의 수위가 높아 자극적이지만, 선정성에만 치우치지 않는다. 주인공인 일본인-서양인 혼혈 남장여자 검객 미즈와 영주의 딸 아케미가 전혀 다른 방법으로 각자의 길을 개척해가는 과정이 감동을 준다. 이런 참신한 캐릭터들이 전형적인 요소들과 잘 버무려져 있다. 미즈가 어릴 때 눈먼 칼 장인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장면, 명문 도장을 찾아가 평정하는 ‘도장 깨기’ 일화, 매춘부들의 복수를 대신 해주는 일화 등을 보면 이소룡 영화부터 사무라이 액션, 서부극, 이 모든 것에 영향을 받은 타란티노 영화까지 연달아 떠오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개항 이전 일본에 침투한 서양인 악당들과 일본 막부 사이의 물밑 거래 및 물고 물리는 배신 등은 신선하고 입체적이다.

무엇보다도 ‘푸른 눈’의 강점은 탁월한 영상미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선혈이 낭자하고 꽤 잔인하다. (…) 하지만 무척 아름답기도 하다. 눈 덮인 풍경 장면들에서 그럴 뿐만 아니라 숲에서 얼음이 떨어지고 홍등가에 핑크색 불빛이 물드는 등의 회화적인 디테일들에서 그렇다”고 평했다. 특히, 큰 삿갓을 쓴 미즈가 눈 쌓인 풍경을 걸어가는 장면들은 우키요에(浮世繪) 풍경화의 거장 우타가와 히로시게(1797~1858)의 설경 판화들을 연상시킨다. 우키요에는 에도시대에 유행한 대중적 그림, 특히 목판화를 가리킨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시리즈 '푸른 눈의 사무라이'(2023)에서 주인공인 혼혈 남장여자 검객 미즈. [사진 넷플릭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시리즈 '푸른 눈의 사무라이'(2023)에서 주인공인 혼혈 남장여자 검객 미즈. [사진 넷플릭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시리즈 '푸른 눈의 사무라이'(2023)의 한 장면. [사진 넷플릭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시리즈 '푸른 눈의 사무라이'(2023)의 한 장면. [사진 넷플릭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시리즈 '푸른 눈의 사무라이'(2023)에서 주인공인 혼혈 남장여자 검객 미즈. [사진 넷플릭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시리즈 '푸른 눈의 사무라이'(2023)에서 주인공인 혼혈 남장여자 검객 미즈. [사진 넷플릭스]

그런데 ‘푸른 눈’이 독특한 것은 분라쿠(전통 인형극), 렌가(주고 받으며 읊는 전통 시가) 등 일본의 전통문화를 잘 활용했고 우키요에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미장센을 펼쳐내지만, 그림 스타일이나 내용 면에서 아니메(일본산 애니메이션) 같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이 시리즈는 미국의 프로듀서 부부(부인은 일본계)가 예술적 애니메이션의 강국인 프랑스의 스튜디오와 협업해서 만든 것이다. 즉, 서구인의 눈과 마음으로 해석하고 재탄생시킨 일본문화, 19세기 자포니즘(Japonisme)의 21세기 버전인 셈이다.

고흐는 ‘거장’ 히로시게 작품 모사

자포니즘은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일어난 일본풍의 유행을 가리키는 말이다. 당시 파리에서 좀 있어 보이려면 집을 기모노·칠기 같은 일본 아이템으로 장식해야 했을 정도였다. 자포니즘 열풍을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그림이 클로드 모네(1840~1926)의 ‘라 자포네스’다. 제목은 ‘일본 여인’이라는 뜻이지만, 붉은 기모노를 입고 부채를 펼친 모델은 모네의 아내인 카미유다. 모네는 그림의 주제가 ‘일본인’이 아니라 ‘일본 문화에 푹 빠진 유럽인’임을 강조하기 위해 원래 금발이 아닌 아내에게 가발을 쓰도록 했다. 그러니까 다소 풍자적인 면도 있는 작품이다.

 클로드 모네의 유화 ‘라 자포네스’(1876). [사진 보스턴 미술관]

클로드 모네의 유화 ‘라 자포네스’(1876). [사진 보스턴 미술관]

하지만 모네 자신도 우키요에로부터 여러가지로 영향을 받았다. 특히 히로시게와 그의 선배 호쿠사이가 후지산 등의 명소를 시각과 날씨에 따라 달라진 모습으로 반복해서 그린 것에 영감을 받았다.  모네는 같은 장소가 빛의 변화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다르게 보이는 것을 연작으로 그리며 인상주의를 정립했다.

당시 서양미술의 고전적인 표현방식에 한계를 느끼던 유럽 화가들은 서양화와는 전혀 다른 우키요에의 대담한 구도와 색조, 시점(視點), 간략하고 명쾌한 선 표현에서 충격과 영감을 받았다. 이런 흐름의 또 다른 대표적인 화가가 바로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다. 반 고흐는 히로시게를 특히 좋아해서 그의 목판화 두 점을 유화로 모사하기도 했다.

왼쪽: 히로시게의 우키요에 목판화 '가메이도의 매화 정원 - 명소 에도 100경 중에서'(1857) 오른쪽: 이것을 모사한 빈센트 반 고흐의 유화 '꽃피는 매화나무 (히로시게를 따라서)'(1887)  [사진 반 고흐 미술관]

왼쪽: 히로시게의 우키요에 목판화 '가메이도의 매화 정원 - 명소 에도 100경 중에서'(1857) 오른쪽: 이것을 모사한 빈센트 반 고흐의 유화 '꽃피는 매화나무 (히로시게를 따라서)'(1887) [사진 반 고흐 미술관]

재미있는 것은 우키요에가 일본에 처음 등장했을 때 일본인에게도 신선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우키요에는 신도시 에도(지금의 도쿄)의 신흥 문화소비층인 상공업자를 타겟으로 한 그림이었고, 드라마틱한 느낌을 주기 위해 원근법 같은 서양화의 기법도 차용했다. 그러한 우키요에가 다시 유럽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서양미술사의 혁명인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를 일으키게 한 것이다.

이처럼 이종의 문화가 섞일 때 탁월한 예술이 탄생한다. 극찬을 받는 애니메이션 시리즈 ‘푸른 눈’이 일본의 전통문화와 미국의 프로듀서와 프랑스 스튜디오가 만나서 탄생한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이 애니는 내용에 있어서도 혼혈 남장여자인 주인공을 앞세워 혼종이 강하고 아름답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지금 K팝과 K드라마가 세계적으로 뜬 것도 사실 순수 한국적이기보다 혼종적이기 때문이다. ‘순혈이 아름답다’는 착각에 빠진 이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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