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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석천의 컷 cut

사실이 과연 모든 걸 말해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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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권석천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권석천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①사건이 터진다→②공방이 이어진다→③녹음파일이나 메모가 등장한다→④여론이 순식간에 기울어진다→⑤법원 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사회적 판결이 내려진다. 뭐냐고요? 제가 30여년의 기자 생활 동안 지켜봐 왔던 사건의 경로입니다. 아, 인정합니다. 저 자신도 그 과정에 가담해왔음을.

영화 ‘추락의 해부’가 파고드는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폭설로 뒤덮인 프랑스 시골 마을, 한 남성이 집 앞마당에서 숨진 채 발견됩니다. 그가 3층에서 추락한 건 분명한데 살해당한 것인지, 스스로 뛰어내린 것인지 묘연합니다. 조사를 마친 검찰은 당시 유일하게 현장에 있었던 아내 산드라(산드라 휠러)를 살인범으로 지목합니다.(※스포 있음)

컷 c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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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서 작가인 부부의 사생활이 벌거벗겨집니다. 검사는 특히 산드라의 부도덕성을 물고 늘어집니다. 그녀의 외도 사실이 폭로되고, 그녀가 남편의 글을 ‘빌려 쓴’ 과거도 드러납니다. 급기야 남편이 사망 직전 USB에 담아 놓은 녹음파일이 두 사람의 폭력적인 관계를 증명합니다. 이제 ‘추락’은 남편의 추락사를 넘어 산드라의 몰락을 의미합니다.

영화 포스터는 ‘사고였나, 살인인가, 자살일까’를 묻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진짜 묻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닌 거 같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과연 모든 것을 이야기해준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눈앞에 놓인 사실만으로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판단하는 것이 옳을까요?

“이거 하나만 알아줘. 엄마는 괴물이 아니야.” 괴로워하는 어린 아들에게 산드라는 간절하게 부탁합니다. 사건의 진실은 쉽게 해부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끝내 알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때로는 사실이 진실을 왜곡시킨다는 것입니다. 10년쯤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네가 알고 있는 사실이 진실과는 다를 수 있다”고.

권석천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