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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병억의 마켓 나우

‘버터냐 총이냐’ 유럽연합의 선택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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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안병억 대구대학교 교수(국제관계)

안병억 대구대학교 교수(국제관계)

“러시아를 막아내고, 미국을 끌어들이고, 독일을 억누르기 위하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초대 사무총장을 지낸 영국의 이즈메이 경은 1950년대 초 미국 주도의 집단안보동맹 목적을 이처럼 명료하게 표현했다.

1949년 창설 후 75년이 지난 현재에도 나토는 건재하지만, 그간 여러 위기에 직면했다. 미 공화당 대선 후보로 유력한 도널드 트럼프는 지난 11일 나토 회원국 가운데 국내총생산(GDP) 대비 2% 국방비 지출을 지키지 않는 나라에 대해 “러시아가 원하는 것을 맘껏 하도록 권하겠다”는 막말을 쏟아냈다. 이 발언은 한 회원국에 대한 공격을 모든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는 나토의 원칙을 부정한다.

마켓 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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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통합을 주도해온 독일과 프랑스는 트럼프의 막말을 규탄하면서 유럽의 안보를 강화하는 여러 방안을 논의해왔다. 이 가운데 프랑스의 핵무기를 유럽화하자는 제안이 재조명된다. 크리스티안 린드너 독일 재무장관은 지난 13일 일간지 프랑크푸르트알게마이네차이퉁(FAZ) 기고에서 미국의 나토 회원국에 대한 안보 공약이 약화한다면 프랑스 핵무기를 공동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유럽연합(EU) 27개 회원국 가운데 프랑스는 유일한 핵보유국으로 2023년 말 현재, 290개의 전략 핵탄두를 보유했다. 사정거리가 8000~1만㎞로 러시아의 군사시설을 타격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업보 때문에 독일의 핵무장 논의는 거의 금기시돼왔다. 2017년 트럼프 집권 때에도 독일의 일부에서 핵무장 논의가 있었지만 더는 진전이 없었다. 반면에 프랑스 핵무기의 유럽화는 2018년에 논의됐다. 당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자국 핵무기 현대화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을 독일이 분담하고 핵무기를 일부 공동 사용하는 방안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세부 논의 과정에서 프랑스는 핵무기의 지휘통제권을 거의 양보하지 않아 독일은 현대화에 동참하지 않았다. 트럼프의 재집권 가능성이 커지기에 이 제안이 다시 진지하게 검토될 수 있으나 프랑스가 양보하지 않는 한 채택이 쉽지 않을 듯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국은 경제성장에 집중할 수 있었고 복지국가를 이룩했다. 이제 러시아와 중국을 비롯한 수정주의 세력들이 대두하고, 트럼프의 재집권 가능성이 높은 가운데 유럽은 더는 마음 놓고 미국에 안보를 의존할 수 없게 됐다.

복지국가 전통이 강한 독일 등 유럽의 여러 나라가 ‘버터와 총’의 상충관계에서 뿌리 박힌 ‘버터(복지) 우선 정책’을 변경할 수 있을까? 말로만 유럽 안보를 외칠 게 아니라 실천이 우선이다. 설령 선거에서 표를 잃을지라도.

안병억 대구대학교 교수(국제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