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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현호의 퍼스펙티브

미래 반도체는 ‘첨단 패키징’의 싸움…집중 육성책 세워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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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미·중 반도체 전쟁과 한국의 대책

안현호 전 지식경제부 차관·전 한국산업기술대 총장

안현호 전 지식경제부 차관·전 한국산업기술대 총장

반도체 산업은 4차 산업혁명의 핵심으로 인공지능(AI), 빅데이터, 6G, 로봇, 항공우주, 양자컴퓨터 등은 물론이고 방위산업의 근간이다. 반도체 기반의 첨단 기술은 민·군이 겸용하며, 경제와 국가안보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런 이유로 반도체 갈등은 미·중 패권 전쟁의 핵심이며, 시간이 갈수록 격해지고 있다.

지구촌은 최근 AI 혁명의 초입에 들어섰다. 관련 산업이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 AI는 인류의 모든 삶을 바꿀 것이며, AI 경쟁에서 뒤지면 열등 기업, 2등 국가로 전락하기 쉽다. 이 때문에 대다수 기업, 국가가 AI 기술에 사활을 건다. 특히 미·중 경쟁이 치열하다. 미국은 중국이 미국 기술(반도체)을 활용해 컴퓨팅 능력을 향상함으로써 안보를 위협한다고 생각한다. 중국이 AI 기술을 방위산업에 활용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중 반도체 제재는 중국 반도체 생태계는 살리되 첨단 반도체 발전은 억제하는 것이 목표다. 반도체산업이 미국의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문제이므로 제재는 적어도 10년은 지속할 것으로 생각된다.

미국 대중 제재는 기회이자 위기
기회 살려 확고한 경쟁력 갖춰야

AI 반도체 커지며 파운드리 중요
그중에서도 패키징 기술력 관건

한국의 후공정 기술 생태계 취약
해외 한국 기술자 적극 영입해야

미국의 대중 제재 10년은 더 갈 것

중국 반도체는 미국의 제재가 지속하는 한 첨단부문의 자립에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중국의 제조 장비 자급률은 10% 내외여서 첨단 주요 장비를 국산화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D램 반도체 자급률도 10% 정도에 그친다. 현재는 19㎚ 양산에 머물러 삼성·하이닉스에 5년쯤 뒤진 상태다. 앞으로도 미국의 규제로 19㎚ 한계를 넘어서기 힘들다. 낸드도 마찬가지다. YMTC가 2020년 4월 128단 낸드 개발과 양산 후 232단 양산을 앞두고 있지만, 현재 미국 정부의 제재로 장비 도입이 어려운 상황이다.

중국 반도체 기업들은 그동안 대규모 정부 지원을 받아 성장했다. 돈을 벌어 다음 세대에 투자비를 마련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따라서 대부분은 자본 잠식 상태이고, 미국 제재로 한계기업도 급증하고 있다. 기댈 것은 정부 지원뿐인데, 중국 정부의 재정도 열악하기에 반도체 기업들은 지금처럼 지원받기 어렵다.

그러나 28㎚ 이상의 저가 범용 부문(특히 장비)은 급속도로 발전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 반도체 산업의 최대 강점인 해외 전문 인력과 거대한 수요에 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반도체 기업의 대다수 경영진은 미국에서 석, 박사를 마친 글로벌 엔지니어다. 또한, 중국은 세계 최대의 전자제품 생산국이다. 언젠가 미국의 제재가 해제되면 중국 반도체 산업은 저가 범용 부문의 기술을 바탕으로 첨단 부문까지 폭발적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TSMC의 최첨단 패키징 기술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미국의 중국 반도체 산업 제재는 한국 반도체 산업에는 중국의 숨 가쁜 추격을 잠시 따돌리고 여유를 가질 기회를 제공한다.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절호의 찬스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현재 상황이 우리에게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미국 규제에 묶여 삼성, 하이닉스의 현지 공장에 첨단장비를 투입하지 못할 진퇴양난에 처해 있으며, 중국의 제재로 중국시장의 일부를 잃을 위험도 있다.

글로벌 반도체 산업은 미국의 대중 제재로 인한 공급망 재편과 AI 혁명이라는 거대한 두 개의 패러다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여기서 살아남기 위한 기업 및 국가 단위의 반도체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중국 반도체 산업의 잠재력은 무섭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얼마 남지 않은 이 기간에 확고한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현재 한국 반도체 산업의 대들보인 삼성전자가 흔들리고 있다. 오랜 기간 1위에 안주하다 보니 방심한 탓은 아닌가 싶다. 미래의 반도체 산업은 AI의 급속한 발전으로 파운드리 부문이 더 중요해진다. 메모리 부문도 범용보다는 HBM처럼 맞춤형으로 재편되고 있다. 결국 첨단 패키징(Advanced Packaging) 부문의 중요성이 급속히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삼성전자는 파운드리 부문의 절대 강자인 대만의 TSMC와의 격차가 좁혀지기는커녕 더 벌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인텔의 추격으로 2위 자리도 흔들리고 있다.

2023년 초 생성형 AI의 등장으로 엔비디아의 AI칩 ‘H100’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H100칩을 생산할 수 있는 업체는 TSMC밖에 없다. TSMC의 최첨단 패키징 기술 덕분이다. H100칩 수요가 폭발하는 상황에서 수요업체들이 삼성에 생산을 맡기고 싶어도, 삼성은 필요한 후공정 기술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라 기회를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 삼성은 H100칩에 필요한 고성능 메모리인 HBM 생산에서도 SK하이닉스에 밀리기도 했다.

파운드리에서 삼성과 TSMC의 격차가 커지는 결정적인 이유는 후공정 기술력이다. 한때 파운드리 전공정 기술력에서도 2~3년 격차가 있다는 분석도 있지만, 이 차이는 크게 좁혀졌다는 평이다. 그런데 후공정 부분에서는 왜 격차가 커지고 있는 걸까?

뿌리 깊은 삼성의 전공정 우선 문화

우선 삼성의 전공정 기술 부문을 우선시하는 뿌리 깊은 문화를 들 수 있다. 글로벌 추세가 후공정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첨단 후공정 기술개발을 소홀히 했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나라 후공정 기술 분야 생태계는 매우 취약한 상태다. 현재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페낭이 후공정 분야 클러스터로 급속히 발전하고 있다. 자칫 우리나라 반도체 생태계가 완전히 뒤처질 위험마저 있다.

한국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분야도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장비는 미국과 일본, 소재는 일본과 유럽이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어 이들과 경쟁할 반도체 기업이 한국엔 거의 없다. 게다가 지금처럼 삼성, 하이닉스와 소·부·장 업체의 종속적 관계가 지속한다면 앞으로도 글로벌 경쟁력을 지닌 업체가 나오긴 어렵다. 반면, 중국의 반도체 소·부·장 업체들은 저가 범용 반도체 분야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특히 장비 분야가 두드러진다. 중국 정부가 반도체 자립 전략 때문이다. 한국 반도체 소부장 업체들이 샌드위치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대책이 시급하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려면 어떤 대책이 필요할까.

후공정 기술 선도하는 한국인 인재

첫째, 중국 반도체 산업 관련 정책 및 현황 파악을 위한 모니터링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 중국 반도체 산업 관련 정책에 관한 정보 파악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중국 정부 정책과 반도체 산업의 분야별·기업별 현황을 파악해야 한다.

둘째, 파운드리 부문, 특히 첨단 후공정 기술 분야의 집중 육성을 위한 중·장기 계획 수립이 매우 중요하다.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역량, 특히 첨단 후공정 기술 역량이 지금보다 대폭 강화되고 관련 생태계도 보강된다면 AI혁명 시대 한국 반도체산업의 위상은 비약적으로 높아질 것이다. 우리나라 첨단 후공정 기술은 뒤떨어져 있으나 글로벌 첨단 후공정 기술을 선도하는 인재들은 한국 사람들이다. 세계적인 후공정 전문업체인 앰코는 사실상 한국업체이며, 인텔도 최근 패키징 총괄 책임자로 한국인을 영입했다. TSMC의 최첨단 고급 패키징 기술 개발을 결정적으로 도와준 사람도 한국 엔지니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외국에서 활약하는 한국 인재 및 기업의 국내 유치가 절실하다. 국내 후공정 기술에 특화된 연구 센터의 설립도 조속히 추진해야 하며, 첨단 후공정 기술 관련 소부장 기업에 대한 지원 대책도 강구해야 한다. 아울러 대학 내에 인재 양성과 기초 연구를 위한 R&D 지원도 병행해야 한다.

셋째, 반도체 소부장 기업 육성을 위한 종합 대책 수립이 시급하다. 해당 분야에서 유망한 기업의 경우는 산학연과 협력해 10년 후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도록 종합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네덜란드의 반도체 소부장 육성 전략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ASML뿐만 아니라 약 30개의 세부 분야 전문 기업들이 있는데, 이는 첨단 하이테크 산학연 클러스터의 결과물이다. 한국도 이제는 단편적인 R&D 지원 정책에서 벗어나 실효성 있는 지원 정책으로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넷째, 미국 주도의 세계 반도체 공급망 재편에 대응해야 한다. 중국과의 수출입 감소 및 대중 직접 투자 축소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 인도와 아세안 등에 대한 협력관계 구축이 중요하다. 반도체 소재·장비의 절대 강자인 일본과의 관계 개선도 필요하다. 일본 기업의 한국 이전은 한국 반도체 생태계를 강화할 것이다. 차세대 반도체 기술 확보를 위한 기초과학 투자에도 힘을 기울여야 하며, 핵심 반도체 인력 유출 방지를 위한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안현호 전 지식경제부 차관·전 한국산업기술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