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950년대도 머리를 제물로?…제갈공명의 만두 기원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왕사부의 중식만담] 만두 변천사

산둥식 만두. 만두는 속에 뭐든 넣을 수 있으니 편식하는 아이에게는 종합비타민과 같다. 박종근 기자

산둥식 만두. 만두는 속에 뭐든 넣을 수 있으니 편식하는 아이에게는 종합비타민과 같다. 박종근 기자

만두(饅頭)는 만능이다. 간식이 되고 한 끼 식사도 된다. 안경에 허옇게 김이 서리는 날 만둣국 한 사발이면 언 몸이 스르르 풀린다. 동아시아문화권 공통음식인 만두, 하지만 나라마다 지역마다 이름도 재료도 모양도 맛도 크기도 제각각이다. 중국이나 일본 식당에 들어가 “만두 주세요” 하면 뭔 소리인지 모르거나 기대와 다른 엉뚱한 음식을 내오기도 한다.

중국에서 만터우(饅頭)는 발효한 밀가루 반죽만을 쪄낸 빵, 속된 말로 ‘앙꼬 없는 찐빵’이다. 생 반죽으로 만든 피에 소를 넣어 쪄내면 자오쯔(餃子), 피가 폭신하면 바오쯔(包子)다. 일본은 만두를 만주(まんじゅう)라 하는데 삶은 팥소가 들어간 전통 과자를 말한다. 자오쯔는 교자(ギョーザ)라 부른다. 네 가지 이야기로 만두를 풀어본다.

첫 번째는 한 번쯤 들어봤을 내용. 제갈공명이 만두를 만들었다는 설인데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가 불을 지폈다. 공명이 남만(南蠻) 정벌에 나섰을 때, 우두머리 맹획을 일곱 번 사로잡고 그때마다 풀어주며 마음을 얻었다. 칠종칠금(七縱七擒) 고사가 여기서 나왔다. 뜻을 이루고 귀환하던 촉나라 군대 앞을 노수(瀘水) 험한 물살이 막는다. 맹획이 풍습에 따라 사람 머리 49개를 바치면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다고 권한다. 공명은 꾀를 내어 밀가루 반죽에 싼 고기를 제물로 올린다. 이를 만두(蠻頭·남만 사람 머리)라 부르고 이 말이 변해 만두(饅頭)가 되었다는 얘기다. 결론은 전설 따라 삼천리일 뿐이다. 중국 유래설은 소설일 뿐 연구자들은 발상지를 중앙아시아 일대로 본다.

한·중·일 음식문화를 탐구하며 『만두』를 쓴 박정배 음식 평론가는 말한다. “만(饅)은 음식을 말하는 식(食)과 ‘~을 싸다’는 의미인 만(曼)을 합해 만든 문자이고, 두(頭)는 접미사의 일종이에요. 소를 피로 감싼 음식이라는 뜻이지요. 남만이 있던 윈난성 일대는 1950년대까지도 사람 머리를 신에게 바치던 와족(佤族)이 사는 땅이고요. 공명은 만두를 이용해 한족 음식을 알린 셈이지요. 이미 이 시기에 중동에서 전파한 밀 문화가 진화를 거듭하며 쓰촨에 이르렀다는 의미로 보면 됩니다.”

두 번째는 알아두면 써먹기 좋은 얘기. 비단길 언저리, 그러니까 서아시아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 낙양에 이르는 지역이 옛 만두 문화권이다. 만트(튀르키예·우즈베크), 맨티(카자흐), 만티(아르메니아), 만투(타지크), 만타(위구르), 만터우(중국). 이름만으로도 확산 경로를 알 수 있다. 북방에 전해진 만두는 남쪽으로 세력을 넓히며 지역마다 다른 만두 문화를 낳았다.

산둥 사람들은 제사상에 대추를 꽂은 만터우를 올린다. 자오쯔를 넣어 끓이는 탕이 훈툰(餛飩)이다. 윈툰(雲吞·광둥), 훈탕(餛湯·산둥), 차오쇼우(抄手·쓰촨), 바오미엔(包面·후베이), 칭탕(清湯·장시)처럼 지역마다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바오(包) 종류는 모두 발효한 반죽을 쓰지만 샤오룽바오(小籠包)만은 발효 안한 반죽을 쓴다. 성젠바오(生煎包)는 바오쯔를 철판에 기름을 둘러 물을 약간 붓고 지지며 쪄서 낸다. 상하이에서 아침에 버스를 타려는데 사람들이 길게 늘어선 줄이 보였다. 잠옷에 슬리퍼 신은 여성도 있었다. 성젠바오를 파는 골목식당이었다. 외국서 온 사람 편의 좀 봐주자는 노인 덕에 맛본 동네 명물 맛은 과연이었다.

중국 만두는 남방으로 갈수록 작고 정교하고 화려해진다. 환경이 모진 북방은 식사가 목적이고 온난한 남방은 모양을 중시하는 미식 문화가 발달한 덕이다. 한입에 쏙 들어간다고 샤오룽바오를 덥석 물었다가는 으악 한다. 뜨거운 육수 테러를 당해 입천장이 훌렁 벗겨지니 말이다. 탕츠(湯匙·넓적한 숟가락)에 올려 적당히 식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길기만 하다. 광둥·홍콩 등 남쪽에서 즐기는 간식(點心·딤섬)은 많고 많지만 그중 으뜸은 만두 종류다. 몽골 기병을 따라 유럽까지 간 만두, 한반도에 들어온 시기도 그즈음이다.

세 번째는 한국 만두 얘기. 지금은 어디나 만두가 있지만, 현대화 이전 한국에서는 북쪽 음식이었다. 고향이 경북 영양인 분과 전남 영암인 분이 가게에 오셨기에 물어봤다. 두 분 다 중학생 시절인 1980년대 초반까지 만두를 구경하지 못했단다. 이때만 해도 한국 남쪽 가정에는 만두문화가 없었다는 말이다. 만두피는 추운 지방서 자라는 밀이나 메밀로 만드니 벼농사를 짓는 따뜻한 지역 음식이 아니다. 거칠게 구분하자면 임진강을 경계로 이북은 만두문화권, 이남은 떡문화권이라 할 수 있다. 백 리 남짓 거리인 개성과 서울 음식문화가 서로 달랐던 이유다.

중국처럼, 압록강을 건너온 만두는 남으로 갈수록 작아진다. 중국 접경 의주의 주먹만한 만두를 특히 ‘대만두’라고 한다. 평양만두 역시 커서 숟가락으로 뚝뚝 끊어서 국물과 함께 떠먹는다. 이보다 작은 개성 만두도 한입에 넣지 못한다. 서울을 비롯한 중부 일부는 떡만둣국을 먹는다.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을 따라 만두도 내려왔다. 전후 원조받은 밀가루가 만두문화 확산에 한몫했다. 대구 명물 납작만두는 1960년대에 생겼다. 물론 중국식 만두는 화교들을 통해 일찌감치 들어와 있었다.

마지막은 추억 한 자락. 하얀 밀가루에 기름기 좔좔 흐르는 소가 들어간 만두는 내 어린 시절 최고 음식이었다. 가난한 집이라도 설날이면 식구들이 둘러앉아 만두를 빚었다. 돼지비계만 들어가도 감지덕지했다. 만두 속에는 은행·대추·땅콩뿐 아니라 동전도 넣어 아이들에게 보물찾기 놀이를 하도록 했다. 다산·건강·장수·성공·재물을 바라는 마음이 들어있다. 자식들을 조금이라도 더 먹이려는 어른들의 지혜다.

이렇게 귀한 만두를 쉽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배달 오토바이가 등장하고 경쟁이 치열해지며 공장 만두를 끼워주면서부터다. 주방장 실력을 가늠하는 잣대이던 군만두는 튀기는 기술을 비교하는 메뉴가 됐다. 만두는 서비스가 아니다. 정성 가득한 종합 요리다. 만두를 직접 빚어 판다면 그만으로도 대접할만하다.

※정리: 안충기 기자

왕육성 중식당 ‘진진’셰프. 화교 2세로 50년 업력을 가진 중식 백전노장. 인생 1막을 마치고 소일 삼아 낸 서울 서교동의 작은 중식당 ‘진진’이 2016년 미쉐린 가이드 별을 받으며 인생 2막이 다시 바빠졌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