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병 명의가 간단한 갱년기 놓쳤다…21세기 신의 손 아이러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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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에 대한 기준

‘명의(名醫) 따라 삼천리’와 ‘닥터 쇼핑(Doctor Shopping)’.

한국인의 특징적인 의료 이용 행태다. 큰 병, 작은 병 안가리고 명의에게서 최고의 의술을 제공받기 위해서다. 특히 병세가 깊은 환자일수록 명의를 만나면 마법의 치료법으로 자신을 고쳐줄 거라 기대한다.

그렇다면 명의의 특징은 무엇일까. 명의의 사전적 의미는 질병을 잘 고쳐서 이름난 의사다. 한마디로 탁월한 의사(Excellent Doctor)다. 현대의학이 도입된 뒤에도 ‘전통적인 명의’는 자신의 눈과(시진, 視診) 귀와(청진, 聽診) 손을(타진, 打診) 이용해 환자를 진찰한 뒤 정확한 진단과 치료법을 제시했다.

명의지만 간단한 질환 놓치기도

출생 후 두 달간 변비로 고생하던 A. 원인을 찾기 위해 이런저런 검사를 한 결과 수술이 필요한 선천성 거대결장 및 높은 간 수치가 발견돼 입원했다. 그런데 다른 일로 병실을 찾은 명의 B교수는 A를 보자마자 전공의에게 입원 사유와 치료 계획을 물었다. 주치의가 “간 수치가 높아 원인을 찾는 중”이라고 답하자 환자를 잠깐 진찰한 B교수가 “갑상선기능저하증이 의심되니 피검사로 확진한 뒤 빨리 치료를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검사 결과는 B교수의 예상과 일치했고 즉시 갑상선호르몬을 투여했다. 전통적인 명의 진료의 단적인 예다.

 반면 ‘21세기 명의’는 자신의 진찰 능력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의과학 기술과 장비를 동원해 정밀 진단을 한 뒤 치료법을 찾는다. 사실 명의라고 해서 모든 병에 대해 명쾌한 진단과 치료법을 제시할 수는 없다. 게다가 같은 증상, 다른 원인도 너무 많다. 기침만 해도 원인은 감기, 폐렴, 기관지염, 천식, 폐기종, 폐암 등 다양하다. 첨단 장비와 더불어 빠르게 발전하는 의술을 익히려면 전공 분야는 세분화되고 숙련 기간은 길어진다.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아이러니하게도 21세기 명의는 자신의 전문분야 외에는 의술을 발휘할 기회조차 많지 않다. 뇌 수술만 보더라도 과거에는 신경외과 명의는 뇌에 발생하는 모든 질병을 수술했다. 반면 지금은 뇌 질환 명의도 뇌암, 뇌기형, 뇌신경증, 뇌혈관 질환, 뇌 외상 등으로 세분화돼 전문분야별로 수술한다. 심지어 뇌혈관 수술도 혈관 안의 병을 수술하는 명의, 혈관 밖을 수술하는 명의가 다르다. 자신의 전문분야를 넘어서는 질병 치료는 다른 명의의 몫이다.

문제는 명의들의 전공은 세분화되었지만 인체는 명의의 전공에 따라 분절된 상태로 작동하지 않는 사실이다.

유명인 C씨는 요통 치료를 위해 초일류 병원 척추 수술 명의 D교수 진료 후 정밀 검사를 받았다. 결과를 본 D교수는 딱히 수술할 상황은 아니라며 환자를 귀가시켰다. 물론 요통은 지속됐다. 그럭지럭 지내다 또 다른 초대형병원을 방문해 이번에는 복부 정밀 검사를 받았는데 복부 대동맥에 커다란 동맥류가 발견됐다. 놀랍게도 동맥류 치료 후 요통은 좋아졌다.

치열한 의대 교육, 수십 년 갈고 닦은 탁월한 지식, 방대한 임상 경험 등을 모두 갖춘 D교수도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닌 질병을 찾아내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는 척추 수술을 잘하는 명의다. 물론 C씨는 D교수의 오진(?)이 실망스럽다.

필수진료과 지원 기피, 명의도 감소

명의가 간단한 질환을 놓치기도 한다. 가슴이 뛰고 갑작스레 식은 땀이 나서 고생하던 50대 여성 E씨. 수소문 끝에 심장병 명의 F교수의 진료를 받고 심장 정밀 검사를 받았다. 하지만 심장과 혈관에는 이상이 없었고 증상은 지속됐다. 그러다 우연히 산부인과에서 갱년기 여성호르몬 치료를 받았는데 심장 두근거림 증상이 좋아졌다.

E씨는 F교수가 명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F교수는 여전히 난치성 심장병 환자 치료도 잘하고 막힌 심장을 뚫는 시술 능력도 신기에 가까운 심장 질환 명의다.

명의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그래도 통상 명의는 생명과 직결되는 필수 진료분야에서 의술을 펴는 뛰어난 의사를 지칭한다. 명의의 존재가 빛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생사를 오가는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은 명의도 매번 어렵고 힘들다. 명의들의 이력을 보면 10~15년 의학에 매진해 전문의가 된 이후에도 평생 긴장된 상황에서 근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청년 시절에는 생명을 구하는 일에 열성을 보였지만 중년을 넘기면서 체력적으로 힘에 부친다. 명의가 회진을 돌 때 환자들이 “선생님, 건강 관리하세요, 저보다 더 아파보여요”라며 걱정해주기도 한다.

힘들어도 과거에는 우수한 의대 졸업생들은 대부분 필수 진료과를 선택해 한국 의료계의 명의 군단을 형성해 왔다. 생명을 구한다는 자부심과 보람을 느끼면서 환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선진국에서는 이런 문화가 존재한다.

불행히도 한국 사회는 30년 이상 필수 진료과 의사를 홀대하고 비난한 탓에 지원자는 지속적으로 급감해왔다. 이는 한국 의료계에 명의들이 빠르게 감소해왔음을 의미한다.

차세대 한국 의료계를 이끌어갈 명의는 MZ세대 몫이다. 합리적 개인주의, 자유와 워라밸 등을 중요시 여기는 MZ세대에서 배출될 의사들이 의료계 주역이 될 시기에는 과연 명의가 얼마나 존재할까.

“의학의 기술이 사랑받는 곳에는 인간성에 대한 사랑도 있다”고 강조한 히포크라테스의 명언이 뿌리내릴 곳 없는 작금의 대한민국 현실이 참으로 아쉽다.

황세희 연세암병원 암지식정보센터 진료교수. 서울대 의대 졸업 후 인턴·레지던트·전임의 과정을 수료하고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중앙일보 의학전문기자로 활동했으며 2010년부터 12년간 국립중앙의료원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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