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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기억] 들리나요, 어린 누이의 귓속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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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7호 31면

‘길 위의 시(詩)’ 시리즈, 2010. ©조병준

‘길 위의 시(詩)’ 시리즈, 2010. ©조병준

이제 갓 걸음마를 뗀 어린 동생이 울며 투정을 부리자, 누이가 무어라 말하며 어깨를 토닥인다. 누이라고는 하지만, 세상의 언어들을 얼마나 익혔을까 싶은 어린아이다. 그래도 누이는, 그 빈약한 언어 속에 동생을 달랠 수 있는 말 몇 마디를 품고 있었던가 보다. 엿들을 수 없는 누이의 말을, 사진이 들려준다.

사진과 한두 줄의 짧은 글이 함께하는 조병준의 아포리즘 사진 ‘길 위의 시(詩)’.

“긴 산문으로도 끝내 다 쓸 수 없는 이야기를 한 줄의 시로 할 수 있듯이, 백 쪽의 글로도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한 컷의 사진이 설명해 낼 때가 있다. 그런 점에서 때로 사진과 시는 등가다.”

조병준은 ‘시인’이다. 그러나 그를 시인이라고만 하기엔 수식이 부족하다. 타고난 떠돌이처럼 오랜 시간 세상을 떠돌며 글 쓰고 떠나고 만나는 삶을 충실히 살아 온 그에게, 시인은 그저 한 가지 수식일 뿐이다.

우선 그는 ‘여행자’다. 청년 시절부터 인도와 유럽을 시작으로 쉼 없이 여행을 이어왔다. 네팔 히말라야 설봉자락 어딘가로 향했다는 소문이 들리는가 싶으면, 새까맣게 탄 얼굴로 에티오피아에서 돌아오기도 하고 그라나다와 프라하, 파푸아뉴기니와 바라나시 사이에 행적이 찍히기도 했다. 30년 동안 12차례나 인도 콜카타 마더 테레사의 집에서 봉사활동을 이어온 ‘자원봉사자’이기도 하다. 여러 권의 에세이집을 내어 ‘에세이스트’로도 사랑받아 왔으며, 2007년에는 여정 속에 만난 사람과 풍경을 주제로 첫 번째 사진전 ‘따뜻한 슬픔’을 선보이면서 ‘사진가’라는 수식까지 덧대었다.

‘길 위의 시’는 그의 두 번째 사진 시리즈다. ‘집으로 가는 길’ ‘엄마 생각’ ‘나무 아래서’ 등 예닐곱 개의 소주제로 구성된 사진들에 직접 쓴 아포리즘 시구들이 어우러져 따뜻하고 깊은 서정적 사진이라는 큰 주제를 이룬다.

사진 속의 길도 사람도 이국적이지만, 그 이국적인 풍경들 속에 담긴 이야기는 오래전에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졌거나 사라져가는 우리들의 서정이기에 낯익다. 그 낯익음이, 사진 속 어린 누이의 귓속말처럼 우리를 위무한다.

박미경 류가헌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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