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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윤정의 판&펀

스피드 재생 시대의 우울한 상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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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이윤정 문화칼럼니스트

이윤정 문화칼럼니스트

나는 나만의 재생 속도를 가지고 있다. 시사프로그램이나 토크쇼 영상은 1.25배속, 오디오북을 들을 때는 1.4배속, 요리나 건강법, 강연 동영상은 1.5배속이 기본 속도다. 넷플릭스나 TV의 연애나 인생 상담 쇼들 역시 1.25배속이나 1.5배속으로 맞춘다. 그나마 10초씩 건너뛰기 버튼을 자주 누른다. 다 IT 기술의 발전 덕분이다. 이전처럼 속도를 올리면 헬륨가스 마신 듯한 목소리가 나오지도 않고, 자막과 함께 보면 내용 이해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느끼고 있다. 드라마나 영화는 아직 배속 시청에 적응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때는 유튜브에서 ‘핵심요약본’을 선택할 수도 있다.

콘텐트 빨리 돌려보기 일반화
창작예술 작품이 ‘정보’로 변질
감상법의 진화인가 퇴화인가

팝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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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무빙’의 작가 강풀은 넷플릭스 대신 디즈니+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배속시청을 선택할 수 없는 채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말과 나의 이런 시청 패턴을 떠올리며 불길한 미래를 상상했다. 먼 훗날 드라마나 영화에 바쳐질 찬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제 속도로 본 사람이 가장 많은 작품”이 아닐까 싶은. 여러 조사기관의 발표에 따르면 최소 25~30% 이상의 시청자들이 배속 시청을 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런 양상은 시간에도 가성비를 따지는 ‘시성비’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나만 해도 그렇게 아낀 시간을 숏폼 영상 같은 딴짓으로 몇 시간씩 허비하는 걸 보면 효율성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그냥 그렇게 빨리 보지 않으면 자꾸 딴생각이 나서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변의 젊은 친구들은 영화 보러 극장에 덜 가게 되는 이유로 비싼 티켓 값도 그렇지만 “자꾸 패스트포워드하고 싶어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원하는 작품은 반복 재생과 관람을 마다치 않는다. 이 시대의 시청패턴은 그렇게 ‘나만의 재생 속도’ ‘내가 원하는 부분만 보기’를 원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작품의 최종 편집권 혹은 ‘속도권’을 놓고 창작자와 시청자 간에 벌이는 거대한 싸움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배속 버튼을 누르는 순간 창작자들이 온갖 예술혼을 불어넣어 한컷 한컷 엮어낸 ‘예술작품’은  플롯을 가진 20~30분짜리 ‘정보’로 변질된다. 문제는 소비자가 그것에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을 때다. 할리우드 작가들이 AI의 시나리오 집필에 항의하는 시위를 했듯 감독들은 이제 “창작자가 원하는 속도로 작품을 재생할 권리를 보장하라”라고 투쟁해야 할지도 모른다.

스트리밍 서비스가 시작되고 다양한 플랫폼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콘텐트가 쏟아지면서 이런 미래는 불가피하게 다가왔다 할 수 있다. 드라마 한편에 16부작, 20부작 그것도 시즌 몇 개라는 회차 정보를 보면 그 부담에 압도당하면서 허상의 ‘시성비’에 쫓기게 되는 것이다. 2022년 조지아텍의 연구진이 1년 동안 1060명의 넷플릭스 시청 시간을 조사한 논문을 보면 하루에 많게는 4.5개의 에피소드를 소비하고 전체 드라마의 45%가 끝까지 시청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시청을 중단한 시점은 드라마 시작 후 25%지점이 평균이다. 드라마의 4분의 1도 채 보지 않고 눈을 돌려버린다면 창작자로서는 그나마 요약본이나 배속 시청으로라도 끝까지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시청자들이 낫다고 여기지 않을까.

시청패턴의 변화는 콘텐트의 변화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넷플릭스의 최근 오리지널 드라마 시리즈들을 보면 이전보다 회차가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살인자o난감’ ‘경성크리처’ ‘사냥개들’ ‘성난 사람들’ ‘비밀의 비밀’ 등 화제작들은 8~10부작이 대부분이다. 광고 때문에 여전히 긴 회차의 드라마를 만들어야 하는 네트워크 TV와는 달리 구독료 기반으로 시청 데이터에 민감하게 대응하는 넷플릭스로서는 응당한 변화로 보인다. 시청자로서도 늘어지는 부분을 건너뛰기 해가면서 봐야 하는 대신 짧은 시간만 투자해도 완결의 느낌이 들 수 있으니 반가운 일이다.

단지 짧아지는 에피소드가 변화의 전부일까. 대중음악을 보면 스트리밍과 숏폼 이후 후렴구가 먼저 등장하는 후크송이나 재생속도를 일부러 빠르게 한 ‘스페드 업’ 버전이 아예 정식음원으로 나오기까지 할 정도다. 기술의 변화가 콘텐트의 기본 틀을 바꿔버린 것이다. 이쯤에서 드는 또 다른 불길한 상상은 넷플릭스에도 공식 ‘스페드업 버전’ ‘핵심요약 버전’이 등장할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DVD 시절의 묘미가 영화의 정식 편집본 외에 ‘디렉터스 컷’을 보는 것이었듯 ‘30분 컷’ ‘1시간 컷’을 내놓고 시청자들은 그것부터 보게 되는. 아니, ‘불길하다’고 말했지만, 나의 본심은 ‘유튜브에서 저작권 침해일지도 모르는 근본 없는 요약본을 찾아 헤매느니 아예 공식 요약본을 플랫폼 안에서 친절하게 서비스해준다면’ 하고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도둑맞은 집중력과 실종된 인내심으로 변질된 우리의 두뇌는 슬프게도 그런 것 없이는 살 수가 없으니. 이것은 기술이 가져온 예술과 콘텐트 감상 방식의 진화일까 퇴화일까.

이윤정 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