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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형철의 리믹싱 셰익스피어

시간이 휘두르는 낫에 무엇으로 맞설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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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는 10음절짜리 행 14개(4-4-4-2 구조)가 규칙적 라임(각운)과 함께 움직이는 정형시다. 총 154편 중 빼어난 것을 고르고, 동시대적 사운드를 입혀 새로 번역하면서, 지금-여기의 맥락 속에서 읽는다.


내가 시간을 알리며 울리는 시계 소리 헤아리면서
장려(壯麗)한 낮이 흉한 밤 속으로 잠기는 걸 볼 때,
제비꽃이 제 한창때 넘긴 것을, 또 검은 머리칼이  
희끗해져 온통 은빛이 되어버린 것을 보고 있을 때.  
내가 한때 가축들 위에 드리워져 열기 막아준 나무
그 우뚝했던 것들 잎사귀 떨어져 앙상한 걸 보거나,
여름날엔 푸르렀던 곡식이 죄다 다발로 동여매져  
뻣뻣한 흰 수염 드러낸 채 상여에 실린 것을 볼 때.  
그럴 때 난 당신의 아름다움에 대해 숙고하게 되지  
시간의 잔해 속에서 그대 또한 떠나야 함을 말이야,
왜냐하면 다정함과 아름다움은 저 자신을 저버리며    
죽으니까, 다른 것들 자라는 걸 보자마자 죽어가니까.  
시간이 휘두르는 낫에 자기를 지킬 방법이란 없지
자손뿐, 시간이 그댈 데려갈 때 맞서줄 이는 그뿐.  
(소네트 12, 신형철 옮김)


‘출산 소네트’ 열일곱 편 중에서 대표로 1번을 읽었으니 이제 저 유명한 18번으로 건너뛰면 좋겠지만 그럴 수가 없다. 열일곱 편 중 하나만 고른다면 1번이 아니라 12번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많은데, 그만큼 대등한 두 작품 중 하나만 다루는 건 공정하지 않을 것이다. 시 자체가 수려하기도 하지만, 12번에서 처음으로 화자인 ‘나’의 목소리가 앞으로 나온다는 게 중요하다. 이 화자가 청자인 청년에게 결혼하라 출산하라 다그쳐 온 건 그가 그만큼 아름답기 때문인데, 마치 좋아하는 이에게 고백은 못 하고 소개팅만 자꾸 주선하는 사람 같이 굴었던 화자가 이제 제 속내를 드러낼 예정인가. 12번에서 ‘나’의 전면화는 13번 이후부터 드러날 욕망의 전조다.

'나'를 내세워 욕망을 드러내
1번이 출산은 우리를 살게 한 이 세계에 대한 도리라고 주장했다면, 이번 시는 모든 게 무상할 뿐이니 아이라도 남겨야 허무를 면할 수 있다고 설득한다. 전반부는 ‘내가 ~을 볼 때’의 구조를 반복하면서, 시간의 고요한 파괴력을 입증하는 증거들을 나열한다. 낮은 밤에 먹히고, 꽃은 시들며, 머리칼은 바랜다는 것. 여기에 이해하기 어려운 건 없다. 언제나 실감 혹은 절감이 어려울 뿐. 예컨대 여름날의 푸른 곡식은 수확되고 나면 뻣뻣한 흰 수염이 되어 수레에 실려 나갈 것인데, 화자와 함께 그 수레를 ‘상여(bier)’라고 부르면서 거기에 실린 것을 시신으로 상상해 보는 건 우리의 실감 혹은 절감에 도움이 될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출산 소네트' 12번
"출산이 미와 덕 계승시키는 길"
하지만 사는 게 결국 손해라면?
프로스트·라킨은 생각이 달랐다

이제 초점은 예상대로 ‘당신’을 향한다. 당신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새로운 것들이 자라는 것만큼 빠르게. 정확히는 당신의 ‘다정함과 아름다움(sweets and beauties)’이 죽는다. 왜 하필 이 두 단어가 한 세트를 이루는가. 헬렌 벤들러에 따르면 셰익스피어 소네트에서 전자는 내적인 ‘덕’을, 후자는 외적인 ‘미’를 함축하는 경향을 보인다는데(그래서 전자를 ‘달콤함’이 아니라 ‘다정함’이라 옮겼다), 이 시에 대해서도 그럴듯한 설명이다. 앞서 언급된 ‘우뚝한 나무’의 경우를 보라. 그 나뭇잎은 가축을 위해 그늘을 제공했고(덕), 또 그 무성함이 아름답기도 했는데(미), 앙상해진 나무는 곧 덕도 미도 사라진 상태라는 뜻이 된다.

마지막 2행이 남았다. ‘낫을 든 죽음의 신’(grim reaper)이라는 전통적인 이미지가 섬뜩하게 제 몫을 해내고, 출산 소네트답게 ‘필멸에 대한 유일한 방책은 자손’이라는 결론이 준비돼 있다. 그런데 돈 패터슨의 말마따나, 암울하고 애상적인 전반부가 워낙 설득력 있어서 후반부의 대안 제시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 거기에 덧붙여 우리 동시대 독자들은 이런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왜 불멸에의 욕망이 당연한 것으로 전제되는가? 밀란 쿤데라는 “불멸은 영원한 소송”이라고 했다. 명예롭게 기억되길 원하다가 끝없는 시시비비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취지다. 오히려 깔끔하고 완전한 소멸에 대한 욕망이 우리 시대의 우세종이라면?

그림=김지윤 기자

그림=김지윤 기자

불멸에의 욕망은 당연한가  
아직은 아니라고, 역시 불멸 욕망이 기본값이라고 해보자. 그렇다고 아이를 낳는 것이 해결책일 수 있는가? ‘태어남을 주다(give birth to)’라는 표현 그대로, 출산은 누군가에게 생명을 주는, 그것도 일방적으로 주는 일이다. 받는 사람의 손익을 추정해 보는 섬세함이 발휘돼야 할 일이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질문(question)’에서 천상의 신이 그렇게 하듯이. “지상의 인간들이여 진심으로 말해 보라, 그 모든 영혼과 육체의 상처들은, 태어남의 대가로는 너무 비싸지 않은지를.” 살아가는 일은 기쁨을 누리면서 상처 또한 입는 일이다. 영업이익이 마이너스인 게 인생의 본질이라면 받는 이에게 선물이 될 리 없다.

더 나아가 모든 자식이 부채를 상속받으며 태어난다면? “그들이 너를 조지는 거지, 네 엄마 아빠 말이야.” 필립 라킨의 시 ‘이것이 시이기를(this be the verse)’의 도입부다. 부모는 제 결점으로 자식을 빚어내기 때문에 언제나 자식을 조진다(fuck up)는 것. 이어지는 “인간은 인간에게 불행을 물려준다”라는 구절은 차라리 경(經) 같고, 시의 마지막은 결국 이렇다. “가능한 한 빨리 거기서 나와, 그리고 아이 따윈 낳지도 말고.” 요컨대 출산은 나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너에게 ‘문제’를 주는 일이라는 것. 이렇게 셰익스피어 반대편에 프로스트와 라킨을 세워 우리는 균형을 맞춘다. 그런데 처음에 말했듯이 이건 셰익스피어의 진정한 욕망의 얼굴이 아니다.

'소네트 12' 영어 원문
When I do count the clock that tells the time,
And see the brave day sunk in hideous night;
When I behold the violet past prime,
And sable curls all silver’d o’er with white;
When lofty trees I see barren of leaves,
Which erst from heat did canopy the herd,
And summer’s green all girded up in sheaves,
Borne on the bier with white and bristly beard,
Then of thy beauty do I question make,
That thou among the wastes of time must go,
Since sweets and beauties do themselves forsake
And die as fast as they see others grow;
And nothing ’gainst Time’s scythe can make defence
Save breed, to brave him when he takes thee hence.

신형철 문학평론가

신형철 문학평론가

◇신형철=2005년 계간 문학동네에 글을 쓰며 비평활동을 시작했다. 『인생의 역사』 『몰락의 에티카』 등을 썼다. 2022년 가을부터 서울대 영어영문학과(비교문학 협동과정)에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