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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석천의 컷 cut

호구인 게 마음 편하다고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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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권석천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권석천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드라마 ‘내 남편과 결혼해줘’(tvN)는 인간관계에 관한 우화입니다. 가장 친한 친구와 남편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긴 강지원(박민영)이 주인공입니다. 말기 암 투병을 하던 그녀는 두 사람의 불륜을 목격한 날 살해당합니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미혼의 회사원이던 10년 전으로 돌아가 있습니다.

인생 2회차를 살게 된 지원은 ‘이젠 다르게 살겠다’고 마음먹습니다. 싫더라도 참고 견디던 예전의 그녀가 아닙니다. 싫으면 싫다고 말하고, 받은 대로 돌려줍니다. 그렇게 자존감을 찾아가는 그녀 옆엔 선배 양주란(공민정) 대리가 있습니다. 양 대리는 관계의 노예로 살던 지원의 판박이입니다. 양 대리는 자신이 ‘호구’인 게 좋다고 합니다. “호구가 제일 마음 편해요.”

드라마 ‘내 남편과 결혼해줘’(tvN) [사진 유튜브 캡처]

드라마 ‘내 남편과 결혼해줘’(tvN) [사진 유튜브 캡처]

‘내가 손해 좀 보면 되지. 괜히 부딪히면 내 마음만 불편하고….’ 문제는 상황이 바뀌지 않는 한 ‘손해 좀 보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겁니다. 지원은 난봉꾼 남편 때문에 속 끓이고 애태우는 양 대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결국 저만 망가지더라구요… 많은 걸 배웠어요. 배려에도 총량이 있다는 거. 나쁜 사람들한테 배려해줘봤자 전혀 모르니까.”

그래요. 신(神)이 아닌 우리가 한없이 배려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배려도 에너지가 필요한 일입니다. 스스로 배려 받는다는 느낌을 가질 때 남을 배려할 힘도 생깁니다.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다고, 그게 더 마음 편하다고, 무례한 사람들까지 배려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다 “자기만 망가지게” 되고, 바닥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주위 사람들 기(氣)를 빨아먹는 ‘에너지 뱀파이어’들에겐 분명하게 선을 그어야 합니다. 그들은 ‘불편하기 싫은’ 당신의 빈틈을 파고듭니다. 당신이 화수분이 아니란 걸 알려주세요. 그래야 그들도 당신을 두려워하고, 존중하는 척이라도 합니다. 어쩌겠어요. 세상이 그런 것을.

권석천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