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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임종주의 시선

이항대립 정치의 '탈구축'을 생각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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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임종주
임종주 기자 중앙일보
임종주 논설위원

임종주 논설위원

총선 민심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는 나흘간의 설 연휴가 어느새 훌쩍 지나갔다. 정치권은 이제 표심의 향배를 좇아 전력 질주할 태세다. 언제부턴가 우리네 명절엔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밥상머리 정치 얘기는 삼가라는 게 불문율이 되다시피 했다. 주변을 귀동냥해보니 지난 설도 예외는 아니었을 성싶다.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왼쪽)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연합뉴스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왼쪽)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연합뉴스

서구 사회도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과 트럼프 전 대통령 간 리턴 매치 색채가 짙어진 미국에선 ‘가족·친구와 정치 얘기를 피하고 싶다’는 비율이 61%에 달했다(2023, 퀴니피액대 여론조사). 정치 성향이 다른 가족과는 추수감사절 만찬 시간을 30~50분가량 줄였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식탁을 사이에 둔 아귀 다툼이나 술병이 날아다니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나름의 현명한 비책일 수 있겠다.

정치의 세계는 ‘내 편/네 편’, ‘보수/진보’, ‘우파/좌파’ 등 타자를 전제로 한 대립적 요소가 질서 있게 골간을 이룬다. ‘공천/낙천’으로 예비후보의 운명이 가려지고 나면 ‘여당/야당’ 간 본선 대진표가 짜이게 되고, 유권자의 ‘선택/외면’으로 ‘당선/낙선’이 판가름난다. 선거라는 링 위에서 ‘삶/죽음’을 건 혈투는 다반사다. 정치 얘기 자체가 논쟁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 구조다.

우리가 크게 의식하지 않을 뿐 세상사가 이 같은 이항대립(대립개념의 쌍)의 연속이다. 언뜻 살펴봐도 하늘과 땅, 선과 악, 참과 거짓, 필연과 우연, 존재와 부재, 파롤(입말)과 에크리튀르(글말) 등의 이원항이 의식의 저변을 흐른다. 시장에서 물건 하나를 살 때도 머릿속에선 ‘비쌀까/쌀까’, 가성비가 ‘높을까/낮을까’, 쓸모가 ‘있을까/없을까’ 등 이항대립의 계산기가 분주히 돌아간다.

투표에 사용 중인 선거도장 이미지 컷. 프리랜서 김성태

투표에 사용 중인 선거도장 이미지 컷. 프리랜서 김성태

어떤 사안을 두 개의 대립항으로 나눠 보면 잘 보이지 않던 것이 안개가 걷히듯 윤곽이 선명해질 때가 많다. 여과 장치처럼 불필요한 정보는 거르고 요긴한 것만 한 방울씩 똑똑 의식 속에 떨어뜨린다. 예를 들어 A 후보 선거 유세장 분위기를 알고 싶으면 이웃 주민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볼 수 있다. A 후보 표정이 ‘밝더냐/어둡더냐’, 목소리가 ‘힘차더냐/약하더냐’, 유세장이 ‘찼더냐/비었더냐’, 유권자의 박수 소리가 ‘크더냐/작더냐’ 등의 질문을 반복하다 보면 현장의 모습이 어느덧 머릿속에 그려진다.

소쉬르 기호학의 ‘기표/기의’ 이항결합 체계나, 12개 음소(소리의 최소단위)의 분별적 대립쌍을 기반으로 한 야콥슨의 음운론, 레비스트로스의 ‘친밀함/소원함’ 이원항을 적용한 친족 관계 분석 등 구조주의 방법론이 하나같이 명쾌하고 참신해 보인 밑바탕엔 공통으로 이항대립주의가 흐른다. “친족의 기본 구조를 2비트로 표현할 수 있다는 레비스트로스의 대담한 가설이 우리에게 알려준 것은 인간은 이항대립의 조합만으로 복잡한 정보를 표현한다는 점이다.”(『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그런데 이항대립주의에는 글로컬리즘(세계화·지역화 결합)에 역행하는 치명적 야만성이 도사린다. 이분법적 편 가르기(범주화)가 수반하는 회색지대 배척과 우열 판단이다. 소수의 목소리는 무시되고 다양성은 외면당한다. 식민은 우월하고 피식민은 열등하기에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은 정당성을 획득하는 식이다. 데리다가 제시한 '이항대립 탈구축(deconstruction)' 개념은 양분법의 한계에 대한 각성이다. “서양 문명보다 뒤처진다고 여겨졌던 여러 지역의 명예 회복을 위한 포스트콜로니얼리즘(탈식민주의)에 대한 논의도 데리다적 발상을 통해 가능해졌다.”(『현대사상 입문』)

지난 2019년 1월 3일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에서 중앙일보와 신년 인터뷰한 고(故) 이어령(1934~2022) 전 문화부 장관. 김성룡 기자

지난 2019년 1월 3일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에서 중앙일보와 신년 인터뷰한 고(故) 이어령(1934~2022) 전 문화부 장관. 김성룡 기자

고 이어령 선생도 일찍이 새로운 문명의 생성은 이자택일의 선택지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가능성의 씨앗이 싹튼다고 역설했다. “주먹과 보자기만 있는 이항대립의 동전 던지기 같은 서구식 게임으로는 과거의 중화주의, 대동아주의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반은 열리고 반은 닫힌 가위가 있기에 비로소 주먹과 보자기는 양국의 문명 대결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금·은·동의 서열을 탈구축한다.”(『이어령의 가위바위보 문명론』)

이항대립의 난폭성에 갇힌 정치
민심은 "이분법 편 가르기 탈피"
새정치 비전·리더십이 변화 열쇠

정치도 이젠 이항대립의 난폭성을 해체해야 한다. 극단적 진영 논리의 굴레에 갇혀 대결을 반복하는 낡은 정치로는 다양성의 공존과 차이의 존중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오롯이 담아낼 수 없다. 여당도, 야당도 싫다는 꽤 두꺼운 중도층의 존재는 이항대립 정치를 탈구축하라는 강력한 신호다. 새 정치에 대한 분명한 비전과 리더십이 변화의 문을 여는 핵심 열쇠다. 그것은 또한 명절 밥상머리 정치 얘기가 비호감의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 지를 가늠하는 척도이기도 할 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