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신복룡의 신 영웅전

호찌민의 유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베트남 하노이 공항에 내렸을 때 나의 심정은 죄스러움이었다. 전쟁의 참화는 슬프다. 3만 명의 ‘라이따이한’은 아빠가 불러주기를 기다리고 있고, 그들의 엄마는 “내가 당신의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고 말한다. 이제 60을 넘긴 라이따이한들은 ‘전쟁의 혼혈’이라며 냉대받아왔다. 우리가 거두어줘야 할 ‘상흔’인데 한국 정부는 손을 놓고 있다. 아무런 적개심을 보이지 않고 웃음으로 맞아주는 그들이 더 무서웠다.

호찌민(胡志明·1890~1969·사진)은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난 고아였다. 21세에 프랑스로 밀항해 30년 동안 파리·런던·뉴욕에서 고생했다. 내가 보기에 현대사에서 칭송받을 만한 정치인은 세 명이다. 입던 옷과 물레, 안경 두 쪽만을 남기고 떠난 마하트마 간디(1869~1948), 우리와의 은원을 떠나 살아서는 자식도 없었고 죽어서는 한 점 재도 없는(生而無後 死不留灰)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 그리고 호찌민이다.

신영웅전

신영웅전

호찌민은 1945년 베트남 초대 주석에 취임했다. 독신으로 살며, 프랑스 식민지 시대 총독 관저 전기기술자의 숙소에서 평생 살았다. 죽으면서 “장례를 간소히 하고 어떤 기념물도 세우지 말고, 시신은 화장해 남북 베트남 산하에 뿌려 달라”고 유언했다. 그의 유산은 성철(性徹) 스님의 것보다 많지 않았다. 그러나 베트남 국민은 하노이 중심가에서 의회를 정면으로 바라보도록 기념관을 짓고 그 안에 시신을 영구 보존했다. 후대 정치인들이 호찌민의 유지를 잊지 않겠다는 뜻이다.

베트남은 이제 더는 ‘슬픈 열대’가 아니고 묵념해야 할 땅이다. 수양산 그늘이 강동 80리를 덮는다(首陽山陰江東八十里)는 말처럼 베트남 어디를 가도 호찌민의 유훈이 흐른다. 이런 지도자를 둔 나라가 부럽다. 저 선량한 눈망울로 어찌 그리 혹독한 삶을 이겨냈을까. 퇴임하면 예외 없이 ‘아방궁’ 지을 생각하는 나라 지도자와는 많이 다르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