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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운찬 칼럼

포퓰리즘식 ‘은행 때리기’를 경계한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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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

선거철이 돌아오자 포퓰리즘이 역대급으로 기승을 부리고 있다. 각종 예비타당성 면제, 100여 개 신도시에 70층 고층 아파트 건축 허용, 서울 인근 도시의 서울 편입 등 끝이 없다. ‘은행 때리기’도 그 일환으로 보인다. 금융 질서를 바로 잡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신(新)관치금융’을 위한 시도라면 곤란하다.

첫 번째 은행 비판은 이자율이 너무 높고 이익을 너무 많이 내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은행도 우리 사회의 다른 부문이나 마찬가지로  ‘카르텔’이 심각한 폐해를 주고 있다는 것, 셋째는 서민경제가 어려운데 은행은 사회적 책임을 소홀히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경제 여건의 변화 속에서 은행의 역할 및 금융혁신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기반하지 않았다는데 문제가 있다.

선거철 맞아 은행 비판 목소리 커져
은행산업 특성 이해 부족에서 비롯
재정 기능 은행이 대신한 측면 있어
은행 역할 인정하고 혁신 유도해야

은행 이익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자 이익의 원천은 대출 규모와 이자율이다. 문재인 정부의 비시장적이고 일관성 없는 부동산 규제로 정책 실패가 거듭되면서 부동산값이 지속해서 상승했고, 그로 인해 집값 상승 기대가 수년 동안 고착화한 상태에서 주택담보대출 규모가 크게 증가했다. 이 과정에서 은행들은 나름대로 LTV(담보인정비율),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등 관련 규제를 준수하며 안정적으로 리스크를 관리해 온 것으로 보인다. 또한 코로나 이후 대출 규모가 늘어난 것은 위기 극복 과정에서 80조원 이상의 중소기업, 소상공인 등 취약계층 대상 만기 연장 및 원리금 상환유예를 수차례 시행했기 때문이다. 이자율도 마찬가지다. 코로나 이후 물가안정과 가계부채 문제 완화를 위해 한국은행은 미국과 비교해도 빠른 속도로 2021년 8월부터 23년 1월까지 모두 10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0.5%에서 3.5%까지 올렸다. 이 과정에서 대출금리 또한 가파르게 상승했다. 그럼에도 미국 금리보다는 훨씬 낮았다. 대출 규모가 크고 이자율이 높으면 실적이 좋을 수밖에 없다. 이를 갖고 은행을 비판하는 것은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고금리 시대의 영끌 청년과 은행의 문턱이 턱없이 높은 중소상공인들 그리고 일반인들 정서에 딱 맞는 정치적 메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우리나라 은행업의 과점적 산업구조로 인해 유효경쟁이 부족하고 사업자 간 담합의 폐해가 발생한다는 주장도 디지털 전환에 따른 은행 산업의 변화에 대한 인식 부족에 기인한다. 단순히 은행 숫자의 적고 많음으로 과점을 정의하고 가격경쟁이 제한되었다고 논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은행과 다른 산업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은행은 네이버, 카카오, 토스 등 강력한 디지털 역량으로 무장한 빅데크, 핀테크 업체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러한 금융서비스 시장구조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고 은행들에 ‘약탈적 카르텔’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적절치 않다. 오히려 정부는 금융서비스시장의 경쟁 심화가 소비자 보호와 금융안정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은행의 효율적 자금중개와 지급결제서비스로 이어지도록 하는 규제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은행의 사회적 기여에 대해서 말하자면, 코로나 위기 극복을 위한 금융지원정책에 은행권이 적극 참여하여 정부의 재정 건전성 유지에 기여했다. 나는 금융지원보다는 정부가 재정개입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은행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정부가 풀어야 할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는 은행의 사회적 기여라는 명목으로 재정이 수행할 역할의 상당 부분을 은행에 떠맡겼다.

은행의 역할 및 은행 산업 전반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바탕을 둔 은행 비판은 금융발전에 역행하는 신관치금융으로 이어질까 우려된다. 지난날 한국의 금융은 정부가 추진하는 각종 정책의 뒤치다꺼리를 많이 해왔다. 그래서 한국의 금융은 정부의 시녀란 말까지 들었다. 개발연대의 관치는 급속한 경제성장을 위한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으나 오늘날 저성장 시대의 신관치는 국민경제에 중장기적으로 비효율을 초래할 것이 자명하다. 정부는 포퓰리즘적 은행 비판보다는, 최근 몇몇 은행들이 소비자 보호나 신뢰는 뒷전에 둔 채 불완전판매로 고객들을 곤경에 빠뜨린 홍콩H지수 ELS 사태를 사전에 방지했어야 했다. 한편 은행도 과거에 라임, 옵티머스 사태 등 스스로의 과오로 인해 국민의 불신을 자초한 사실을 겸허히 인정하고 새로운 모습을 보여야 함은 물론이다.

은행이 적정한 수익을 토대로 자율적인 경영을 할 수 있어야 은행의 본디 기능인 대출심사가 제대로 이루어져 한국경제의 자원배분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금융당국은 은행경영이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투명하게 이루어지도록 관리, 감독하는 한편 경제 여건의 변화 속에서 은행의 필수적 역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바탕으로 은행 산업의 혁신을 이끌어야 한다. 은행에 대한 지나친 비판과 과도한 압박이 사회적 안전판으로서의 은행 역할 약화나 축소를 가져와서는 안 된다.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