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 앞두고 보람 찾으려 벽지 자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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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사람들은 얼마만큼 타인에게 조건 없이 봉사할 수 있을까.
또 그 봉사를 위해 얼마나「편안함」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일까.
절해고도 같은 첩첩산중의 박정수 교사(59)는 이런 물음들을 다시 곰곰 생각게 해주는 사람이다.
박씨는 「하늘 아래 첫번째 학교」라는 고사리분교를 홀로 맡아 꾸려 가는 늙은 교사다.
해발 l천m의 밀양 사자평고원에 자리 잡은 이 학교는 학생이래야 l학년 1명, 4학년 2명이 모두인 「초미니」초등학교.
학교의 정식 명칭은 산동초등학교 사자평분교지만 고사리가 많이 난다고 붙여진 「고사리분교」라는 이름이 더 유명한 학교다.

<학생은 화전민 자녀>
박씨가 이곳에 부임해온 것은 88년3월.
『지난 56년이래 30년이 넘는 교직 생활의 마감을 앞에 두고 이곳 아이들을 지도하는 것도 하나의 봉사려니 생각돼서 자원했습니다.』
별로 말이 없는 사람이지만 「자원」이라는 단어가 조금은 겸연쩍어서인지 『저 자신이 원래시골 출신이고 시골이 그냥 좋아서』라는 말을 덧붙었다.
그는 교실 한 옆에 붙어있는 단칸 숙소에서 3년째 혼자 산다.
환갑을 한해 앞둔 그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이 곳에서 손수 밥도 짓고 빨래도 하고 방도 치운다.
「고사리분교」의 본교인 산동초등학교 근처에서 자녀들과 함께 살고 있는 부인은 한 달에 두 번 정도 이곳을 다녀가고 한번쯤은 그가 집에 내려간다.
홀아비와도 같은 그의 자취생활을 안쓰러워 하던 주민들이 줄곧 『식사만은 함께 하자』고 졸라 요즘은 등산객 상대로 영업을 하는 한 학부형 집에서 식사를 해결한다.
표충사에서 가파른 등산로를 따라 한시간 반정도 걸어 올라가야 당도하는 이 학교는 지난60년 이곳 화전민들의 자녀를 위해 사자평분실로 처음 문을 열었다.
30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을 거쳤다지만 지금까지 이 학교를 거쳐간 학생 수는 겨우 29명.
20평 남짓한 교실에 l학년과 4학년을 합친 전교생 세 명이 난로를 앞에 두고 옹기종기 앉아서 공부를 한다.
교실뒷벽에 「솜씨자랑」 「새 소식」등이 붙어 있고 과학실험도구·학급문고 등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잘 정돈된 모습은 도회지의 교실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책상 세개만 덩그렇게 놓여져 있는 탓인지 공간이 꽤 넓어 보이고 창 밖으로는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는 산줄기들이 내려다보이는 게 도시학교와 다른 모습이다.
쉬는 시간마다 난로에 장작조각을 집어넣는 박씨의 얼굴은 교실만이 아니라 추위에 굳어있는 산 전체를 녹일 듯 따뜻하고 평화롭다.
『개구쟁이들과 씨름하다 보면 어느 사이에 하루가 지나는지 모르겠어요.』
박 교사는 거의 하루종일 아이들과 함께 지낸다.
학교수업은 오전9시10분에 시작해서 오후 4시에 끝나지만 바로 이웃해 사는 아이들은 방과후에도 학교에서 뛰놀기 때문이다.

<35년째 교사 생활>
박씨에게 아이들은 단지 학생에 그치지 않고 자식이나 손자와도 같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박씨를 선생님이자 마음씨 좋은 이웃집 할아버지쯤으로 여겨 따른다.
박씨는 『우리야 늘 함께 지내니 한 식구지요』하고 말한다.
표충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마을에서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가 교직 생활을 시작한 것은 지난 56년부터다.
밀양농고를 마친 뒤 법관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경희대 법학과를 다닌 그는 졸업한 바로 그해 부친의 병환으로 고향에 돌아왔다가 그 길로 교사가 됐다.
6남매의 맏이인 그가 가사를 맡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이후 그는 줄곧 밀양에서만 교사생활을 했다.
『욕심 없이 그저 성실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교직의 길을 걸어왔다』며 『후회는 없다』고 말한다.
그 자신의 말처럼 그가 크게 욕심을 내지 않고 살아와서인지 그의 삶은 적어도 옆 사람이 보기에는 평탄한 것으로 보인다.
환갑을 앞두고 벽지근무를 자원한 것도 그에게 있어서 그저 성실하려고 애썼던 삶의 한 부분일 뿐이다.
『인생이 고해라는데 어디에서나 어려움은 있는 것이겠지요. 이곳에 올라오면서 어려움에 대해선 별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불편하고 답답할 때도 있지만 아이들과 지내다 보면 보람도 느끼고 재미도 있습니다.』
전기가 안 들어와 밤이면 촛불을 켜놓고 지낸다.

<내년 2월 되면 「하산」>
교육관계 책도 읽고 부산에서 대학에 다니는 자식에게 편지도 쓴다.
촛불을 켜놓고 앉아 있는 밤이면 가끔은 숙소 창에 부딪는 허허로운 바람이 옆구리를 지날 때가 있다고.
그는 또 『주말 저녁에 몰려왔던 등산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엄습해오는 적막감을 느낍니다』라며 가족과 떨어져 사는 생활의 적막함을 털어놓는다.
박 교사는 내년 2월말이면 3년 임기를 마치고 「하산」을 한다.
『지루하고 답답할 때도 있었지만 3년이 어느 새 지나갔어요』
아이들에게 도시생활이나 현대사회의 모습을 이해시키는데 어려웠던 것, 세명 뿐이라 사회성 교육을 충분히 할 수 없었던 것 등이 특히 그를 아쉽게 하는 것들이다.
그는 이곳에서 마지막 방학이 될 이번 겨울방학을 이용해 아이들에게 부산 나들이를 시켜줄 계획에 부풀어 있다.
부산에서 대학에 다니는 자식의 자취방을 빌려 2박3일 동안 지하철이며 항구 등을 구경시켜주려 하고 있다.
자식의 소풍을 앞둔 부모의 심정처럼 그는 걱정 반 설렘 반으로 겨울 방학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글·사진 이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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