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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한 사이, 더 심한 갈등 생기기 쉬워…도 넘으면 둘 다 손해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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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6호 17면

게임이론으로 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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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여당 비상대책위원장의 갈등이 노출돼 국민들이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여당 정치인과 야당 정치인의 대립은 어느 정도 당연한 만큼, 놀랄 일은 아니지만 같은 여당의 그것도 오랜 기간 같이 일해 대단히 친밀한 관계로 잘 알려진 두 사람의 갈등을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경제학의 ‘홀드업 문제(hold-up problem)’라는 이론에 따르면 오히려 친밀한 사람들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생기기가 쉽다. 필자의 개인적 경험으로도 큰 갈등을 겪었던 대상 중에 잘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매일 만나서 같이 일하는 친밀한 사람과 갈등을 겪은 적이 대부분이다.

잘 모르는 사람엔 되레 예의 바른 태도

왜 그럴까. 나와 별 관련이 없는 사람의 행동이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로서는 다시 만나지 않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내게 항상 정중하고 예의 바른 태도로 대해주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인 가족들 사이에서는 무례한 말을 주고받으면서 다투는 경우가 종종 생기는 것이다. 경제학에서는 관계를 맺는 행동을 일종의 투자라고 생각한다.

자동차를 생산하는 갑(甲)이라는 대기업이 자동차의 창으로 쓸 유리가 필요한데, 이를 직접 생산하는 기술이 없어서 유리를 전문으로 생산하는 을(乙)이라는 중소기업과 계약을 맺었다고 하자. 그 계약에 따르면 해당 중소기업 을은 자동차를 만드는 대기업인 갑의 주문에 따라서 유리를 생산해야 한다. 모든 자동차의 유리가 똑 같은 모양과 품질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자동차는 디자인이 다양한 관계로 을로서는 갑을 위해 대량의 자동차 유리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다른 자동차 기업들을 위한 생산은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될 것이다.

물론 갑이라는 대기업에 꾸준히 납품할 수 있다면 을로서는 큰 이득이므로 갑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오로지 갑을 위한 자동차 유리를 만들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일반적인 유리가 아니라 특정 회사를 위한 특정한 유리를 제조하기 위해서 을이라는 중소기업이 자신의 생산 설비를 변경하는 것을 경제학에서는 ‘특정 관계를 위한 투자’(relationship-specific investment)라고 부른다. 특정 관계를 위한 투자를 했다는 의미는 다른 거래처와는 더 이상 거래를 하기 힘들 상황이라는 의미다.

GM과 자동차 차체 생산업체 피셔 바디는 서로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다 홀드업 문제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사진은 피셔 바디 생산 라인. [사진 클리블랜드 주립대 마이클 슈워츠 도서관]

GM과 자동차 차체 생산업체 피셔 바디는 서로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다 홀드업 문제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사진은 피셔 바디 생산 라인. [사진 클리블랜드 주립대 마이클 슈워츠 도서관]

일단 을이 갑을 위해서만 자동차 유리를 생산하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갑으로서는 자신의 자동차에 필요한 유리를 을이 안정적으로 공급해 줄 것이므로 을에게 고마운 마음이 생기지 않을까? 경제학의 홀드업 이론에 따르면 갑은 자신을 위해 특정 관계를 위한 투자를 통해 자동차 유리를 안정적으로 공급해 주는 을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는커녕 을을 더 압박해서 납품 가격을 낮추고 납품 기간을 더 당기고자 할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한데 바로 을이 갑의 자동차에만 쓰일 수 있고 다른 용도에는 쓰일 수 없는 독특한 디자인의 유리만을 생산함으로써 갑 이외의 기업에는 유리를 판매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기 때문이다. 즉, 을로서는 갑의 무리한 요구에 기분이 상하고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자신의 유리를 팔 수 있는 곳이 갑뿐이기 때문에 손해를 감수하고 갑의 요구를 들어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어 홀드업(hold-up)은 ‘인질’이라는 의미가 있는데, 을이 갑에게만 팔 수 있도록 자신의 공장 설비를 갖추는 순간 을은 갑의 인질이 된다는 의미에서 경제학에서는 ‘홀드업 문제’라고 부른다. 중소기업을 상대로 대기업들이 횡포를 부린다고 이야기할 때 그 대부분의 문제는 바로 이런 홀드업 문제와 관련이 있다. 만일 한 대기업이 횡포를 부린다면 중소기업은 그 대기업과의 관계를 끊고 다른 대기업과 거래를 하면 된다. 하지만 특정 관계를 위한 투자를 이미 진행한 중소기업은 더 이상 다른 기업에 자신의 물건을 팔 수 없거나, 엄청난 비용을 들여서 다시 자신의 공장 설비를 바꾸어야 하기 때문에 현재 납품하고 있는 대기업의 횡포를 참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홀드업 문제,  강자·약자 따로 있지 않아

지금부터 100년 전 미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피셔 바디(Fisher Body)라는 자동차 차체(body) 즉, 자동차의 가장 바깥의 몸체를 만드는 중소기업이 있었다. 그런데 자동차 대기업인 GM이 피셔 바디에게 오로지 GM의 차체만을 생산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GM과 같은 대기업의 모든 차체를 공급하면 피셔 바디로서는 큰 이익이 발생하므로 당연히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피셔 바디는 다른 자동차 기업의 차체는 생산을 완전히 중단하였다. 이후 GM과 피셔 바디 사이에는 홀드업 문제가 발생했고, 그 결과 큰 피해를 입게 된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피해를 입은 측이 중소기업인 피셔 바디가 아니고 대기업인 GM이었다는 사실이다. GM이 차체를 자신에게 완전히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피셔 바디는 의도적으로 납품일을 늦추면서 GM에 “제 시간에 납품을 받으려면 차체 가격을 높여 지불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결국 이런 피셔 바디의 무리한 요구를 참지 못한 GM은 1919년 피셔 바디를 인수했다고 한다.

홀드업 문제에서 강자와 약자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피셔 바디에게 GM은 독점적인 구매자이므로 피셔 바디를 협박할 수 있는 힘이 있지만, 반대로 GM에게도 피셔 바디는 독점적인 판매자이므로 피셔 바디가 GM을 협박할 수 있는 것이다. 특정 관계를 위한 투자를 한 주체는 피셔 바디뿐 아니라 GM이기도 했던 것이다. 양자는 서로의 인질이 된 셈이다. 인간이나 조직이나 한 번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이렇게 중대하고 무서운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가족이나 직장 동료와 같이 가까운 관계의 사람 사이에서 오히려 극한 갈등이 발생하는 것도 홀드업 문제로 해석할 수 있다.

별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불쾌하게 하고 무리한 요구를 한다면 그 사람은 쉽게 나를 피해 떠나버릴 것이다. 그래서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친절하게 대해서 나의 요청을 들어주도록 잘 달래야 한다. 반면 이미 떼려야 뗄 수 없는 친밀한 관계에 있는 가족이나 직장 동료의 경우에는 내가 다소 불쾌하게 대하고 무리한 요구를 한다고 해서 나를 버리고 떠날 수가 없다. 그러니 친절하게 대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무리한 요구를 자꾸 해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자 하여 갈등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홀드업 문제가 발생할 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당사자들이 다툼을 벌이고 도를 넘은 갈등을 일으킨다면 그 손해는 양 측 모두가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아마 대통령과 여당의 비상대책위원장도 이번 경험을 통해서 이런 경제 원리를 깨달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순구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1991년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대에서 박사 과정을 마쳤다. 게임이론의 권위자로 『그들은 왜 최후의 승자가 되지 못했나』 『당신의 경제 IQ를 높여라』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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