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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복룡의 신 영웅전

라과디아 판사의 심금 울린 판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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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피오렐로 라과디아(1882~1947·사진)는 이탈리아 이민의 후손이었다. 미국 뉴욕대학을 졸업하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소령으로 제대한 뒤 뉴욕의 치안 판사가 됐다. 1920년대 어느 겨울 한 노인이 절도죄로 잡혀 왔다. 나흘을 굶고 식료품 가게에 들어가 빵을 훔친 죄 때문이었다. 빵값은 10달러 정도였다. 그 노인을 심문한 라과디아 판사는 그에게 10달러의 벌금을 선고했다. 그러나 그 노인에게는 그만한 돈이 없었다.

그러자 라과디아 판사가 다시 평결을 내렸다. “이 노인이 이렇게 어려운 삶을 살게 된 데에는 이 비정한 도시에 사는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돌보지 않은 죄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이 잘못에 대해 나 자신에게 벌금 10달러를 선고합니다. 그리고 이 법정에 온 모든 참석자도 함께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각기 5센트의 벌금을 선고합니다.”

신영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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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모자를 돌리니 누구도 군말 없이 벌금을 냈다. 헤아려 보니 모인 돈이 57달러50센트였다. 라과디아 판사는 모인 돈에서 10달러를 벌금으로 납부하고 나머지를 그 노인에게 줬다. 그다음의 법정 분위기나 노인의 후일담에 관해서는 독자들이 흐뭇하게 상상하도록 여백으로 남겨둔다.

라과디아 판사가 이탈리아 출신 동족이라는 이유로 마피아의 회유와 협박을 많이 받았으나 타협 없이 요지부동으로 범죄를 다스렸다. 그러한 강직함과 인간미로 명성을 얻은 그는 1923년 주의회에 진출해 1933년까지 하원의원을 역임했다. 그 뒤에는 1934년부터 뉴욕 시장을 4년씩 세 번 역임했다.

시장에서 물러난 뒤 그는 유엔에서 구호국 사무총장으로 일하다가 65세의 연부역강한 나이에 타계했다. 1953년 뉴욕시는 그의 업적을 기려 뉴욕 공항을 ‘라과디아 공항’으로 이름을 바꾸고 동상을 세웠다. 지금은 주로 국내선 공항으로 쓴다. 우리 정치에는 왜 그런 감동이 없을까.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