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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존폐 갈림길에 놓인 예비타당성조사 제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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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배국환 전 기획재정부 2차관

배국환 전 기획재정부 2차관

‘고추 말리는 공항 3형제’라는 말이 한때 회자한 적이 있다. 양양·무안·울진공항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들 공항은 예비타당성조사(예타) 제도가 없었던 시절에 착공된 공항들이라 타당성 조사를 근거로 탄생한 공항들이 아니다. 경제적 타당성이 크게 미흡한 공항들이라서 개항 이후 적자를 면치 못하거나 아예 개항을 못한 공항도 있다.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에 의해 도입된 예타 제도가 시행된 지 올해로 26년째다. 대규모 사회간접자본(SOC) 사업이 무분별하게 추진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방안이 예타 제도다.

1998년 도입, 비효율 SOC 방지
특별법으로 예타 무시 나쁜 선례
정치권의 잇단 무력화 중단해야

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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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재정법에는 총사업비가 500억원 이상이고 국가의 재정 지원 규모가 300억원 이상인 사업을 예타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1999년부터 2022년까지 961개 사업, 436조원에 대해 예타를 통해 절감한 예산 규모는 170조원에 이른다. 2024년도 예산(657조원)의 4분의 1 수준에 해당하는 규모다.

그런데 최근 예타 제도가 큰 위기를 맞고 있다. 많은 사업이 이런저런 이유로 예타 대상에서 빠져나가고 있어서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특별법으로 예타를 면제해주는 경우다. ‘가덕도 신공항 특별법’(2021년)과 ‘대구·경북 통합 신공항 특별법’(2023년)이 대표적 사례다. 두 사업은 특별법으로 국가재정법 조항을 무력화시킨 경우다. 재정법 체계를 왜곡시키기 때문에 몹시 나쁜 선례를 남겼다. 예타 제도는 이때 이미 종언을 고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본다.

지난해 말에 대구와 광주를 잇는 ‘달빛철도 건설 특별법’ 제정을 놓고 정치권과 재정 당국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에서는 예타가 수도권처럼 인구가 많은 곳에서 잘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낳고 결국 지역 균형발전을 더 어렵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법 규정에 대한 과도한 해석이다. 예타 운용지침에 따르면 이미 수도권과 비수도권에 대한 판단 기준에 상당한 차이를 두고 있다. 수도권의 경우 경제성 기준의 가중치가 60~70%인데, 비수도권은 30~45%로 낮다. 한편 비수도권은 지역 균형발전 기준이 30~40%를 차지한다. 가중치로 보면 지방이 훨씬 유리한 구조다. 예타 제도가 수도권에만 유리한 제도는 아니란 의미다.

그렇다면 예타 제도를 통해 재정 당국이 권한을 남용하고 있는가. 사실과 다르다. 오히려 재정 당국은 예타 제도를 더 엄격하게 운용해야 한다. 정치적 압력이나 지역주민의 민원에 흔들려서는 안 된다. ‘재정을 지키는 골키퍼’가 이 눈치 저 눈치 볼 필요가 없어야 한다. 예외는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 그걸 남용이라 매도하면 곤란하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재정 당국과 줄다리기하던 ‘달빛철도 건설 특별법’이 여야 합의로 지난 25일 국회를 통과했다. 이제 예타 제도는 유명무실해져서 제도 자체가 소멸할 우려가 커졌다. 달빛철도 사업이 내세운 목표는 영호남의 동서 화합, 지역 간 균형발전이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나 주장은 다분히 추상적이며 정치적으로 보인다. 총사업비 9조~12조원이 들어가는 대규모 사업을 예타 없이 추진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 철도가 생긴다고 해서 영호남인들이 생각한 대로 왕래가 잦아질까. 빈 객차만 오락가락하면 적자가 눈덩이처럼 커질 텐데, 벌써 걱정스럽다.

국회에 계류 중인 예타 면제 관련 법안이 32건이나 된다. 국가재정법상 면제 조항을 추가하거나 특별법으로 면제시키려는 것들이다. 예타로는 도저히 통과될 수 없는 사업들을 추진하기 위한 요구들이 봇물 터지듯 쇄도하고 있다.

일본이 잃어버린 30년 동안 경기 부양을 위해 수많은 추경으로 지역 SOC 사업을 추진했으나 돈만 퍼부었을 뿐 실제 경기는 냉랭했다. 오히려 빈 도로와 막대한 빚만 남겼다. 지역 인구가 많이 줄고 고령층이 급증하는 상황에서 도로·철도 시설 이용자가 급감했기 때문이다.

한국도 인구가 빠르게 줄고 있고, 고령화 속도는 일본보다 빠르다. 지방 소멸 위험지역이 전체 지자체의 52%나 된다. 지금 5200만 명이 사용하는 SOC 시설은 장차 상당 부분 과잉 시설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국가 SOC 시설에 대한 장기계획을 재점검하고 예타에 따라 사업을 진행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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