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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김경숙의 실리콘밸리 노트

직장인들의 숙명 ‘이놈의 영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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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정김경숙 전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

정김경숙 전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

상황 1. 원어민 구글러와 대화 중이었다. “I was really shy at that time, and I did not like to expose myself···”(수줍음을 많이 타서 사람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어요)라고 말하는데, 갑자기 그 동료가 얼굴이 벌개져서 “워워”하며 내 말을 가로막았다. “그렇게 쓰면 내 ‘거시기’를 드러내는 것을 싫어했다는 뜻이에요.” 알고 보니 ‘다른 사람 앞에 나선다’고 할 때는 수동태를 써야 했다. “I did not like to be exposed”가 바른 표현이었다. 이렇게 잘 못 말한 적이 수십번이었는데, 그동안 나는 바바리맨(!)이 되기 싫었다고 말해왔던 것 아닌가. 맙소사. 속으로 ‘이놈의 영어’를 되뇐다.

상황 2. 스타벅스 바리스타 아르바이트하는 날이다. 커피를 만들어 “데니스(Denis), 데니스, 데니스, 커피 나왔어요!” 고객 이름을 세 번이나 크게 불렀지만 대답이 없다. 커피가 식을 무렵 어떤 여성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혹시 드니스(Denise)를 부른 거였나요?” 드니스를 데니스로 잘못 불렀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고 미안했다. 영어철자 e가 맨 뒤에 있고 없고의 작은 차이지만, 명확하게 구분되는 남녀 이름으로 발음 또한 다르다. 한국식으로 치면 ‘영숙님’을 ‘영식님’이라고 잘못 부른 격. 또 한 번 속으로 ‘이놈의 영어’를 되뇐다.

직장인의 스트레스 주범 영어
커리어 성장 기회로 생각하길
계량화와 시각화로 동기 부여
‘꾸준히’가 결국 가장 빠른 방법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언어에 큰 재주가 없던 나는 마흔살에 ‘영어 한번 제대로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소리내기인 ‘파닉스(phonics, 발음공부)’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렇게 작정하고 영어 공부한 지 10년이 되었을 때 기회가 왔다. 구글 미국 본사에 새로운 팀을 만들어 옮겨온 것이다. 말발 좋고 글발 좋은 원어민들로 가득 찬 커뮤니케이션팀에서 최초 비원어민 디렉터로 일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단연 영어였다. 한국에서 그나마 통했던 ‘배려 영어’와는 달리 미국에서의 영어는 ‘알아서 들으려면 들어라’ 식의 전투 영어였다. 영어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다. 그 후 4년은 그야말로 영어와의 치열한 싸움이었다. 머리도 굳고 혀도 굳은 상태에서 원어민들과 뒹굴었던 영어 분투 경험을 책으로 낸 뒤 한국인 직장인들에게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이 있다. “영어 공부, 어떻게 꾸준히 할 수 있는가요?”

첫째는 내 영어가 나아지고 있다는 증거 만들기다. 인간에게 가장 큰 동기 부여는 어제보다 나아진다는 자각이다. 새해 시작마다 이런저런 영어학습 앱 깔고 학원도 등록하지만 오래 못 간다. 직장 일과 가사에 치이면서 없는 시간 쪼개 영어공부를 하는데도 달라지는 게 없으니 중단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언어라는 게 하루아침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어서 늘 본인은 제자리 같지만 사실은 늘고 있다. 가장 좋은 증거물은 녹음하는 것이다. 내 영어를 녹음해서 현재와 비교하면 3개월 전 내 영어는 부끄럼 순도 100%다. 지금 영어가 당연히 늘었다. 또 영어 공부를 같이하는 선생님이나 동료에게 내 영어가 그동안 얼마나 좋아졌는지를 피드백 받는 것도 동기 부여에 도움이 된다.

두 번째는 공부를 계량화 혹은 시각화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나는 영어 오디오북을 한권 뗄 때마다 포스트잇에 책 이름을 써서 벽에 붙여 놓는다. 오디오북은 일주일에 한권 이상 듣는다. 1년이 지나면 70~80개의 포스트잇이 한 벽면을 가득 채운다. 늘어나는 포스트잇을 보면 뿌듯하다. 오디오북은 주로 걷거나 뛰면서 듣는다. 매일 2만보 이상이다. 이를 거리로 환산하니 1년 만에 미국 동서 횡단을 할 정도다. 이렇게 매일매일 공부를 숫자로 바꿔 한눈에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동기 부여에 큰 도움이 된다.

오늘도 바리스타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객에게 수십번 이름을 묻는다. “May I ask your name?” 출근길 몰아닥치는 고객들로 입에 단내가 나고 정신이 없어 말이 헛나오곤 한다. 고객 이름을 묻는다는 게 그만 “Do you have a name?(이름 있어요?)”라고 했다. 그렇게 내뱉고선 그 고객과 같이 눈을 맞추고 한동안 웃었다.

챗GPT와 같은 생성 AI가 스마트폰에 장착이 되어 통번역이 우리 삶에 한층 가까이 왔다. 그러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언어로 말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이다.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문화, 새로운 사람,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된다. 영어 공부, 대부분의 직장인에게 또다시 찾아오는 좀비 같지만, 꾸준히 하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다. 영어, 이번에는 끝까지 가봅시다!

정김경숙 전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