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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기억] 집안으로 나비가 들어오면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75호 31면

‘어리비치다’ 시리즈 가운데, 2010년 ⓒ인주리

‘어리비치다’ 시리즈 가운데, 2010년 ⓒ인주리

빈 벽 앞에 꽃무늬 방석이 하나 오롯하다. 벽지가 밀리고 해진 흔적으로 등을 기대었던 사람을 기억하고 있듯이, 가운데가 팬 방석도 앉았던 사람의 무게를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의 빈집을 찍은 사진가 인주리의 사진 시리즈 ‘어리비치다’의 한 장이다.

어리비치다는 어떤 현상이나 기운이 은근하게 드러나 보인다는 뜻의 우리말 동사다. 제목이 말해주지 않아도, ‘어리비치다’의 사진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은근하게 드러나는 어떤 숨결 같은 것이 느껴진다.

사진의 배경이 된 충청남도 당진의 집은 1600년대에 지어진 오래된 기와집으로, 인주리의 조상들이 대를 이으며 살아왔다. 인주리는 그 집에서 마지막으로 태어난 사람이고, 아버지는 그 집에서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족들은 이사를 했고, 가구와 물건들은 그대로인 채 더 이상 사람은 살지 않는 빈집이 됐다.

인주리는 400년 동안이나 이어져 오던 삶이 갑자기 멈춰버린 그 빈집을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 사용하던 물건은 생전 그대로인데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부조리를 통해, 아버지의 죽음을 인정하려는 노력이었다.

그런데 사진 작업을 계속하면서, 자신이 아버지의 ‘텅 빈’ 부재를 찍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절대 찍을 수 없게 된 아버지를 찍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희 할머니는 집안으로 나비가 날아 들어오면 ‘우리 엄마가 나 보러 오셨네’라고 하셨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 집에 혼자 있는데, 아버지가 늘 앉으시던 자리에 희미한 빛이 비치더군요. 문득 아버지인가,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에 아직도 빛이 들어와서 머물다 사라지고, 문틈 사이로 바람이 들어와 공기를 흩트렸다 돌아나갔다. 그럴 때면 반닫이 문이 살그머니 열리거나 생전의 아버지가 옷을 걸어두던 벽면에 흰빛이 어리비쳤다. 집 여기저기 사소하고 미묘한 곳에서 아버지의 숨결이 느껴졌고, 텅 빈 것만 같던 집이 어렴풋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2011년 인주리의 첫 개인전으로 선보인 사진의 제목 ‘어리비치다’는 ‘얼이 비치다’와 발음이 같다.

박미경 류가헌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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