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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GB "미국이 에이즈 개발" 거짓 정보로 반미 여론 키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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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5호 24면

[제3전선, 정보전쟁] ‘덴버 작전’으로 본 허위정보전

1987년 9월 29일 캐슬린 베일리 미국 국무부 차관보가 소련이 미국에 대한 허위 정보를 퍼뜨리는 데 개입했으며 그 결과 세계 일부 지역에서 미국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점점 더 커졌다는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 미국국방대학교 국가전략연구소·윌슨센터]

1987년 9월 29일 캐슬린 베일리 미국 국무부 차관보가 소련이 미국에 대한 허위 정보를 퍼뜨리는 데 개입했으며 그 결과 세계 일부 지역에서 미국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점점 더 커졌다는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 미국국방대학교 국가전략연구소·윌슨센터]

1983년 7월 17일 인도의 패트리엇 매거진이 느닷없이 에이즈(AIDS)는 미 국방부가 개발한 생물무기라는 기사를 실었다. 그리고 아직 치료약이 없어 지구적 재앙을 불러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 국방부로선 다행스럽게도 당시 이 기사에 관심을 보인 나라는 거의 없었다. 이 매체가 국제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데다, 기사의 출처도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무심히 지나쳤던 이 기사는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가 동독 슈타지, 불가리아 정보국(KDS)과 합동으로 벌인 허위정보전의 시작이었다. 코드명 ‘덴버 작전(Operation Denver)’이라 불린 이 작전은 당시 세상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에이즈 전염병이 ‘사실은 미국의 생물무기였다’는 허위정보를 확산시켜 반미 여론을 조성하고 미국의 대외 영향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 같은 사실은 소련, 동독, 불가리아 정보기관들이 주고받은 비밀문서가 나중에 불가리아 국가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되면서 밝혀졌다.

제3세계 정상들에 브로슈어 보내 여론전

1986년 10월 31일 소련의 일간지 프라우다에 게재된 만화. AIDS가 미국의 생물학전 연구자들의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사진 미국국방대학교 국가전략연구소·윌슨센터]

1986년 10월 31일 소련의 일간지 프라우다에 게재된 만화. AIDS가 미국의 생물학전 연구자들의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사진 미국국방대학교 국가전략연구소·윌슨센터]

KGB는 작전의 첫 불씨를 인도에서 지폈다. 1981년 에이즈 전염병이 갑자기 전 세계로 퍼져나가자, 지구촌은 에이즈 감염으로 모두 죽을 수 있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이를 지켜본 소련은 에이즈의 원인을 미국에 뒤집어씌워 반미 여론을 확산시키면 미국과의 냉전에서 유리한 환경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곧바로 인도의 친(親)소련계 매체인 페트리엇 매거진에 에이즈의 미국 기원설을 자세히 게재했다. ‘익명을 원하는 미국의 과학자와 인류학자’의 말이라고 인용하면서, 에이즈는 미 국방부가 새로운 생물무기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으며 그 기원을 개도국으로 떠넘기기 위한 비밀계획을 세웠다는 줄거리였다. 팩트와 거짓을 교묘히 뒤섞고, 출처도 익명의 과학자로 처리해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처럼 꾸몄다.

패트리엇 매거진을 통해 허위정보전의 밑자락을 깔아 놓은 KGB는 불가리아 정보국과 공조해 허위정보 증폭 단계에 들어갔다. KGB는 소련의 유력지 리체라투르나야 가제타를 통해 패트리엇 기사가 좀 더 신빙성있게 보이도록 허위정보를 덧칠했다. 미국 과학자들이 에이즈 바이러스를 찾기 위해 아프리카와 남미를 방문했으며, 마약중독자와 동성애자를 임상실험 대상으로 삼았다고 그럴듯하게 포장했다. 이어 불가리아 정보국은 KGB가 밑자락을 깔아 놓은 이 신문들을 다시 인용해 개도국과 유럽으로 확산시켜 나갔다(1985년 9월 7일 KGB 비밀문서).

미국 정부와 서방 의학계의 비판이 잇따르자 이번에는 동독 슈타지와 과학적 공조 체제를 가동했다. 슈타지가 에이즈 발원지는 미국이라는 것을 믿게 할 과학적 연구와 증거를 만들고, KGB가 이를 전파하는 역할분담 방식이었다 (1986년 9월 3일 슈타지 문서). 슈타지는 바로 움직였다. 동독 훔볼트 대학의 제이콥 시걸 박사로 하여금 ‘에이즈 : 특성과 기원’이라는 53쪽 분량의 ‘시걸 보고서’를 발표토록 했다. 에이즈는 VISNA와 HTLV-1이라는 두 종류의 바이러스를 유전적으로 결합해 만들었으며, 과학기술 수준으로 볼 때 미국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것이 요지였다.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용어를 사용해 고도의 과학적 지식이 동원된 것처럼 꾸몄다. 에이즈의 미국 기원설을 믿고 싶은 사람들에게 시걸 보고서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 과학적으로 포장된 허위정보는 예상대로 서방언론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1986년 10월 26일 영국 선데이 익스프레스의 에이즈 의혹 보도는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다. 친소련 매체가 아니라 보수언론으로 분류되던 이 신문의 보도는 어느 정도 신뢰성이 있는 것으로 받아 들여졌다. 선데이 익스프레스가 보도한 후 일주일이 지나자 전세계 30개국의 언론이 미국의 에이즈 개발 의혹을 보도했다. 허위정보가 날개를 달기 시작한 것이다.

KGB가 짐바브웨 비동맹 정상회의에 보낸 에이즈 허위정보전 브로슈어 표지. 독일 베를린 스파이 박물관 소장. [사진 미국국방대학교 국가전략연구소·윌슨센터]

KGB가 짐바브웨 비동맹 정상회의에 보낸 에이즈 허위정보전 브로슈어 표지. 독일 베를린 스파이 박물관 소장. [사진 미국국방대학교 국가전략연구소·윌슨센터]

KGB는 제3세계권 정상들에게도 허위정보전을 펼쳤다. 1986년 9월 짐바브웨에서 개최된 제8차 비동맹 정상회의에 ‘에이즈, 아프리카 기원이 아니라 미국이 만든 악마’ 라는 브로슈어를 특별 제작해 보냈다. 정상들이 제목만 봐도 선전될 수 있도록 직설적인 내용을 담았다. 특히 가장 약한 고리인 아프리카는 집중 공략 대상이었다. 아프리카 인들은 아프리카가 에이즈의 진원지가 아니라는 말 자체만으로도 환영한다는 것을 KGB는 잘 알고 있었다.

이 같은 노력으로 에이즈의 미국 기원설은 1987년 80개국에서 보도될 정도로 예상외의 성과를 보였고 덩달아 반미정서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KGB는 더 욕심을 냈다. 1987년 동독과 불가리아 정보당국에 보낸 비밀전문을 통해, 에이즈는 미군을 통해 많이 전염된다는 허위여론을 유포해 미군의 해외 주둔을 축소시키자고 제안했다. 한발 더 나아가 에이즈 허위정보전을 벤치마킹해 미국의 전략방위구상(SDI)을 위축시킨다는 계획도 밝혔다. 과학자들을 동원해 컴퓨터로 작동되는 SDI 무기체계는 컴퓨터 실수로 우발적 핵전쟁을 일으킬 수 있고, 이는 에이즈처럼 지구적 재앙이 될 것이라는 공포를 증폭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이를 통해 미국의 SDI 구상을 위축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결과적으로 이 구상들은 실현되지 못했다. 1980년대 말 소련이 붕괴 조짐을 보이자 덴버작전의 동력이 급속히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1992년 프리마코프 러시아 해외정보국(SVR) 국장이 이례적으로 에이즈 허위정보는 KGB의 공작이었음을 자인하면서 덴버작전은 막을 내렸다.

덴버작전은 에이즈 허위정보를 통해 미국을 고립시키기 위한 것으로 KGB는 신문사, 출판사, 방송사는 물론 과학자와 우방국 정보기관까지 동원해 총력전을 펼쳤다. 그 결과 아프리카, 남미지역에서 반미정서가 확산되는 등 가시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 에이즈 감염 희생자를 많이 발생시켰다. 소련의 허위정보로 인해 제3세계권 국가들이 성접촉 자제 등 에이즈 예방대책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당시 남아공에서 무려 30만명 이상의 에이즈 사망자가 발생한 것은 이 때문이다. 또한 정보조작으로 인한 인류의 정신적, 물리적 폐해도 가볍지 않다. 정보기관이 정책적, 전략적 차원에서 과잉정보을 유통시키는 경우가 있지만, 덴버작전과 같이 인류의 일상과 생명에 영향을 미치는 악의적 왜곡정보는 법적, 외교적, 윤리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렵다.

허위정보로 남아공서 30만명 에이즈 사망

정보전쟁

정보전쟁

덴버 작전을 다른 차원에서 짚어볼 필요는 있다. 정보활동의 범위가 전통적인 영역인 정보수집을 넘어 다른 나라 정책이 자국에 유리하게 바뀔 수 있도록 은밀하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준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를 입법으로 명문화했다. 정보당국은 “미국 정부의 개입이 드러나지 않도록 은밀하게 다른 나라의 정치, 경제, 군사에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규정한 것이다(국가안보법 제503조 e항). 여론정보전이 대표적으로 여기에 해당된다. 여론정보전은 유언비어 유포 차원을 넘어 국가의 대외정책 수단으로 발전했다. 코로나19 당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중앙정보국(CIA)에 코로나의 기원을 규명하도록 지시한 것이나, 중국이 이를 거세게 반발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덴버 작전은 허위정보의 유통구조 이해에도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했다. 팩트와 거짓을 교묘히 뒤섞어 의혹을 증폭시킬 경우 일반 시민들은 분별하기 어렵다는 것을 실증했고, 그 파장은 사회분열과 국정운영의 집중력 약화로 이어진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이러한 허위정보의 유통구조에 대한 이해가 올해 더 주목되는 이유는 전 세계 70개국에서 선거가 치러지는 해이기 때문이다. 여론이 분열되는 선거철에는 허위정보가 더 잘 유통되며 효과도 더 크다. 그래서 국가 간 허위정보전은 선거철에 더 빈번하게 나타난다. 2018년 프랑스가 ‘정보조작근절법’을 제정한 것도 이러한 배경이 작용했다.

4월 한국 총선에 이어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다. 선거 결과에 따라 국내 정국은 물론 동북아와 세계질서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미 양국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는 세력과 이를 막으려는 세력간의 두뇌전과 정보전이 이미 느껴진다. 유권자인 국민의 감시가 가장 중요하다.

최성규 고려대 연구교수. 국가정보원에서 장기간 근무하며 국제안보 분야에 종사했다. 퇴직 후 국내 최초로 비밀 정보활동의 법적 규범을 규명한 논문으로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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