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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정탁의 인문지리기행

일본인 어머니 임종 못한 채 새 종자 개발 외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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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부산 동래의 자유천(慈乳泉)과 우장춘 박사

김정탁 노장사상가

김정탁 노장사상가

겨울철 과일로는 단연 귤인데 지금처럼 귤을 맛보게 된 건 얼마 되지 않는다. 60년 전만 해도 우리 과일 목록에 귤이 없어 겨울철에는 이렇다 할 제철 과일을 맛볼 수 없었다. 그런데 귤이 흔해진 데는 우장춘(禹長春, 1898~1959) 박사의 공이 결정적이다. 그는 제주도가 귤 재배에 적합한 곳임을 알아 70여 년 전 서귀포 동홍동에 1500평 정도의 시험지를 만든 뒤 일본 기타큐슈(北九州) 등에서 감귤 품종을 들여와 시험재배에 착수했다. 이 시험재배를 통해 귤 재배기술을 체계화하자 제주도 곳곳에 귤밭이 생겨나 이제는 귤이 겨울철 과일로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이승만, 여권 안 내줘 장례식 못가
조의금으로 ‘어머니의 젖’ 우물 파

노벨상 점쳐지던 세계적 육종학자
제철 귤, 풍성한 배추·감자도 개발

부산 시민 “대마도와도 안 바꿔”
마지막 순간까지 새 벼 품종 개발

배추·양배추 교잡해 제주 유채꽃 개발

부산시 동래구 주택가에 있는 자유천. ‘자애로운 어머니의 젖’이라는 뜻이다. 원예시험장 식수로 쓰기 위해 팠다. 임종하지 못한 어머니의 조의금을 활용했다. [사진 우장춘 기념관, 김정탁·김석우]

부산시 동래구 주택가에 있는 자유천. ‘자애로운 어머니의 젖’이라는 뜻이다. 원예시험장 식수로 쓰기 위해 팠다. 임종하지 못한 어머니의 조의금을 활용했다. [사진 우장춘 기념관, 김정탁·김석우]

제주도의 또 다른 명물인 유채 보급에도 우장춘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유채가 이미 세상에 나와 있었어도 배추와 양배추의 교잡을 통해 유채를 실험적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때마침 한국에 식용유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는 일본에서 만든 유채를 갖고 들어와 한반도 남쪽에 시험적으로 재배했다. 재배 결과 제주도가 기후 조건상 가장 유리하다는 게 밝혀져 1951년부터 유채를 제주도에 본격적으로 심었다. 이것이 제주도 봄 관광을 상징하는 유채 꽃밭이 탄생한 배경이다. 그러니 유채는 농산물을 넘어 이제는 관광상품으로도 제주도민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토종 배추. [사진 우장춘 기념관, 김정탁·김석우]

토종 배추. [사진 우장춘 기념관, 김정탁·김석우]

일본 재래 배추와 양배추를 교잡해 개발한 지금의 풍성한 배추. [사진 우장춘 기념관, 김정탁·김석우]

일본 재래 배추와 양배추를 교잡해 개발한 지금의 풍성한 배추. [사진 우장춘 기념관, 김정탁·김석우]

또 토종 배추를 지금처럼 크고 풍성한 배추로 바꾼 사람도 우장춘이다. 그는 일본의 재래 배추와 양배추를 교잡해 우리 환경에 맞는 배추를 개발했는데 지금 우리가 김치를 담글 때 사용하는 배추다. 이 배추는 병충해에 강한데다 맛도 좋아 김치를 더욱 맛있게 먹게 된 건 우장춘의 덕이다. 그는 이 배추를 중국산 ‘차이니즈 캐비지’로부터 따로 분리해 ‘김치 캐비지’로 명명한 뒤 이를 국제학회에 등재함으로써 김치의 한국화를 이루는 데도 공헌했다. 지금은 김치가 세계 5대 건강식품 중 하나로 자리 잡은 데다 김치에 열광하는 세계인이 늘고 있음을 감안하면 우장춘의 공에 새삼 고개 숙여진다.

씨 없는 수박 안 만들었는데도 유명

우장춘은 배추뿐 아니라 무도 지금처럼 크고 풍성한 종자로 바꾸었다. 그가 이런 시도를 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토종 배추와 토종 무를 계속해서 먹거나 아니면 일본에서 배추와 무의 씨앗을 수입하는 수모를 상당 기간 감내해야 했다. 일제강점기 동안 쌀과 보리만을 경작해 당시 우리나라에선 종묘업의 자본과 기술이 제대로 축적되지 않아서다. 이런 난감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그는 우량품종 개발에 헌신하면서 동시에 육종학의 중요성을 널리 홍보해야 했다. ‘씨 없는 수박’을 만들지 않았는데도 이것으로 유명해진 건 그가 개발한 신품종들에 대한 불신을 씻기 위해 씨 없는 수박을 시범적으로 재배해 보여서다.

우장춘은 병충해에 강한 감자 보급에도 절대적으로 기여했다. 강원도는 감자 산지로 유명한데 당시 강원도 감자는 특정 바이러스에 취약해 바이러스가 한번 창궐하면 감자 농사가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그때마다 적지 않은 강원도민들이 굶어 죽어서 그는 강원도 감자의 종자를 변형시켜 면역력이 강한 작물로 탈바꿈시켰다. 이런 그의 노력이 결실을 얻어 강원도에서 감자 생산량이 많이 늘어났다. 황무지와 다름없던 강원도 대관령이 한때 감자 특산지였던 것은 오로지 우장춘 때문이다.

1950년 한국 귀환 직전 찍은 가족사진. 뒷줄 왼쪽 둘째가 교세라 창업자인 이나모리 가즈오의 부인인 둘째 딸이다. [사진 우장춘 기념관, 김정탁·김석우]

1950년 한국 귀환 직전 찍은 가족사진. 뒷줄 왼쪽 둘째가 교세라 창업자인 이나모리 가즈오의 부인인 둘째 딸이다. [사진 우장춘 기념관, 김정탁·김석우]

우장춘의 이런 업적들은 1950년 그가 일본에서 영구 귀국했기에 가능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우장춘을 한국에 보내기 싫어서 감옥에 가두려는 꼼수까지 부려 그의 귀국을 막으려고 했다. 그는 이런 조치에도 굴하지 않고 조선인 강제수용소에 자진 입소해 한국에서 보내준 신분증을 제시한 뒤 송환선을 타고서 고국에 돌아왔다. 일본은 어째서 우장춘의 귀국을 막았을까? 동경대 박사학위 논문인 ‘배춧속 식물에 관한 게놈분석’을 통해 종의 합성이론을 증명해 보여 다윈 진화론의 새 지평을 열어놓음으로써 육종학의 세계적 권위자가 되어서다. 종의 합성이론은 지금까지도 유전학 교과서의 주요 내용으로 다뤄진다.

대한민국도 그의 귀국을 간절히 바랐다. 해방 직후 우리나라의 농업 생산력은 현저히 떨어져 우량 종자 개발과 보급이 시급했다. 그래서 그가 부산항에 입항했을 때 부산시민은 “대마도와도 우장춘을 바꾸지 않는다”라며 그의 환국을 뜨겁게 반겼다. 그렇지만 그에게 환국이 마냥 좋은 건 아니었다. 일본에서 연구 활동을 계속했다면 생리학이나 의학 분야에서 노벨상 수상을 충분히 바라볼 수 있었는데 그는 식량이 부족한 고국의 당면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환국 이후에는 학문적 연구가 아닌 실용적 연구에 몰두해 논문 발표보다는 우량품종의 개발에 집중해서 순수학자의 길을 사실상 포기했다.

어머니 “을미사변 가담 아버지 죄 갚아야”

귤이 겨울철 제철과일이 된 것도 우장춘의 공이다. [사진 우장춘 기념관, 김정탁·김석우]

귤이 겨울철 제철과일이 된 것도 우장춘의 공이다. [사진 우장춘 기념관, 김정탁·김석우]

우장춘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희생한 데는 일본인 어머니의 공이 크다. 그녀의 남편은 별기군 훈련대 대대장 우범선(禹範善)인데 그는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를 가까이서 모신 탓에 을미사변 때 그녀가 살해되자 일본인 자객에게 명성황후가 누구인지 확인해 주었다. 부친의 이런 행적으로 우장춘은 역적의 자식으로 살아야 했다. 또 그의 나이 5살 때 대한제국이 보낸 자객에게 아버지가 살해돼 생계마저 어려워지자 동생과 함께 보육원에 맡겨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어머니는 우장춘에게 “너의 아버지는 조국에 큰 죄를 지었으니 이를 갚아야 한다”라고 가르쳤다.

이런 어머니가 환국 후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에 가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여권 발급을 도와달라는 편지를 썼는데도 발급받지 못해 어머니 임종을 멀리서 소식으로 들어야 했다. 그가 일본에 가면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이 돼 이 대통령도 그의 부탁을 일부러 들어주지 않았다는 소문이 당시 파다했다. 우장춘은 할 수 없이 상복을 입은 채 원예시험장 강당에서 어머니 위령제만 지내야 했다. 이때 각계에서 받은 조의금으로 ‘자애로운 어머니의 젖’이란 뜻인 자유천(慈乳泉) 우물을 파는 데 썼다. 당시 원예시험장에 식수가 부족해서였는데 그가 시험 재배했던 귤도 지금 우리에게는 겨울철의 자유천이지 않겠는가.

우장춘은 자신에게 드리워진 아버지의 어두운 그림자를 지우고자 최선을 다했다. 십이지장궤양으로 병원에 입원해서도 한참 실험 중이던 일식이수(一植二收)의 벼를 비닐에 넣어 링거병이랑 같이 걸어 놓고서 관찰했다.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마지막 작품을 완성하겠다는 일념에서다. 그가 남긴 유언도 한국농업과학연구소에서 가져온 벼를 손에 쥔 채 “이 벼! 끝을 보지 못하고 죽다니”였다. 우장춘은 한 번 심어서 두 번 거두는 이기작(二期作)이 가능한 벼 품종을 당시 개발하고 있었다.

세 차례 수술에도 회복하지 못하고 1959년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의 이른 죽음은 낯선 고국에서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면서 과로한 탓이라 본다. 죽는 날까지 따라다닌 아버지의 어두운 그림자에 더해 이승만 정부가 촉발한 한일관계의 긴장으로 인해 우리 정부는 그의 훈장 수여를 놓고서 갑론을박만 계속했다. 그러다가 죽기 사흘 전 병상에서 ‘대한민국 문화포장’이 수여되었다. 이때 우장춘은 “조국이 날 인정했네. 근데 좀 더 일찍 좀 주지”라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는데 정부수립 후 최초로 거행된 사회장이다.

일본 화투 변형해 고스톱 개발도

밟혀도 밟혀도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금빛 찬란한 꽃을 피우는 길가의 민들레처럼 살아왔기에 우장춘은 일본인과 한국인의 숱한 냉대 속에서도 세계적인 육종학자로 우뚝 설 수 있었다. 한 가지 의외인 건 화투놀이를 아주 좋아했는데 단순히 즐긴 게 아니라 수학적 확률에 관심이 많아서다. 그래서 화투 족보의 확률을 연구하고 계산한 책을 출판하려다 상관인 데라오 박사에게 혼난 적도 있다. 환국 후에는 일본 화투놀이 코이코이를 변형해 고스톱을 개발했으니 고스톱의 최초 보급자인 셈이다. 딸 넷에 아들 둘을 두었는데 둘째 사위가 일본에서 가장 존경받는 경영인이자 교세라의 주인인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다.

김정탁 노장사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