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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인혜의 미술로 한걸음

이 그림들을 어디 가면 볼 수 있나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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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김인혜 미술사가

김인혜 미술사가

최근 『살롱 드 경성』이라는 책을 냈다. 서울이 ‘경성’으로 불리던 일제강점기에도 ‘살롱’이라 할 만한 예술가 집단이 건재했음을 보여주는 책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에서부터 오지호, 이인성, 이쾌대 등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화가들까지 총 30명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이 책의 독자 후기에 이런 반응이 많다. “반 고흐나 모네 같은 외국 작가는 알면서, 왜 나는 이런 훌륭한 한국 화가들을 이제야 알았나.” 또 독자들은 묻는다. “이 그림들을 어디 가면 볼 수 있나?” 책의 도판 중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이 꽤 많다는 사실에 놀란 이들은 이렇게도 말한다. “그림 보러 국립현대미술관에 가봐야겠다.”

전통과 현대 사이의 근대 부재
동시대를 좇아가기 바빴던 역사
누락된 역사 재건은 국가 책무
국립근대미술관 설립 검토해야

미술로 한걸음

미술로 한걸음

그런데 이 자리를 빌려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가도 이 그림들을 볼 수 없다! 최근 기증받은 고 이건희 회장 기증품을 포함해서 국립현대미술관에는 만 점이 넘는 소장품이 있지만, 근대 시기 미술품을 ‘상설’ 전시할 공간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그림들은 거의 수장고에 보관되고 있는 형편이다.

그렇게 된 이유를 우리는 미술관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의 국립미술관은 1969년 처음 생겼다. ‘미술관’이라는 개념도 없던 가난한 시절이었다. 그러니 말이 ‘미술관’이지, 당시 말썽 많던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을 “잡음 없이 개최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족한 기구였다. 그러던 중 1980년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앞두고, 번듯한 국립미술관 하나 없는 나라 꼴을 외국인에게 보이기 싫어 급히 추진된 사업이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건립이었다.

바로 이때 국립미술관의 방향성이 처음 정립됐다. ‘현대’ 즉 영어로 말하면 ‘동시대’의 미술에 초점을 맞추기로 말이다. 그러고 보면 한국미술은 그때까지 세계와 시간적 보조를 맞춰 전개된 적이 없지 않나.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동시대 세계미술과 함께 호흡해야 한다’는 조급함과 강박증은 일종의 시대 의식이었다. 과천 미술관의 이경성 초대관장은 1919년생으로, 근대 작가들과 시대를 공유했던 뛰어난 근대미술 전문가였지만, 그런 그가 더욱 ‘현대’ 미술관을 주창했다. 근대기는 너무 어둡고, 싸움판이었고, 무엇보다 친일, 월북 문제로 얼룩져 시대적 ‘금기’ 사항이 너무 많았다. 일단 이 시기는 덮어두고, ‘발맞추기 과업’을 먼저 수행하려 했던 그의 선택은 분명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누락될 수밖에 없었던 부분이 바로 한국 ‘근대’ 시기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전통미술을 다루고, 국립현대미술관은 동시대 미술을 다루니, 그 사이가 빠졌던 거다. 문제는 그런 출발이 지금까지도 국립현대미술관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 이제는 과천관뿐 아니라 서울관, 청주관, 덕수궁관(사진) 등 4관 체제를 갖춘 대규모 미술관으로 급성장했지만, 여전히 ‘동시대’의 실험이 미술관 전시 공간과 프로그램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나마 1998년, 근대미술 강화를 위한 기관으로 덕수궁미술관이 문을 열었지만, 관장이 바뀔 때마다 근대 중점 정책도 수시로 변했다. 현재는 단 3명의 학예연구사가 악전고투하며 이 시기를 커버하는 실정이다. 지금 열리고 있는 장욱진(1917~1990) 전시에서 보듯, 그 작은 그림들도 다 걸지 못할 350평의 조그만 전시장에서 말이다.

자,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책 『살롱 드 경성』에 등장하는 화가들 이름을 ‘내가 왜 여태껏 몰랐나?’ 자책할 필요가 없다. 그 훌륭한 화가들을 알 수 있는 환경이 지금까지 없었던 거다. 국가가 그런 장(場)을 충분히 제공해 주지 못했으니까. 그것은 나라 탓이다. 이유가 어찌 되었건, 결과적으로 지금껏 제대로 된 근대미술관 하나 없는 나라가 무슨 문화 강국이고, 경제 대국인가.

그래서 지난주 대학로 ‘예술가의 집’에서 ‘국립근대미술관 설립을 위한 포럼’이 개최됐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참석해서 놀랐다. 새로운 공간이 생겨서 근대 미술품을 일상적으로 관람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필요성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어디에 어떻게? 혹자는 이건희기증관이 송현동에 지어진다면 어느 정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까 생각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 이건희컬렉션 중 국립박물관과 미술관의 공백을 가장 잘 메꾸어준 부분이 근대미술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왕이면 그런 계획에다, 이 미술관을 ‘근대미술’에 더욱 진심인 국립근대미술관으로 발전시킨다는 구상을 업고 설계하면 어떨까? 또 이왕이면 국립현대미술관이 적극적으로 개입해 이 미술관을 일종의 분관으로, 더 전문적이고 독립적으로 키우면 어떨까? 관계자들의 의견은 분분하겠지만, 국민의 희망은 단순하다. 이제 우리도 파리의 오르세나 뉴욕의 모마(MoMA) 같은 멋진 근대미술관이 있는 나라에서 살아보고 싶다!

김인혜 미술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