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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봐야 아름답다, 맨해튼 야경도 그렇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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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10년째 신혼여행 ⑨ 미국 뉴욕

멀찍이 떨어져서 봐야 그 진가가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다. 뉴욕 맨해튼의 야경도 그렇다. 맨해튼 도심을 담을 수 있는 최고의 명당은 의외로 뉴저지에 있는 해밀턴 공원이다. 이곳에서 허드슨강 너머의 도심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사진 뉴욕관광청]

멀찍이 떨어져서 봐야 그 진가가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다. 뉴욕 맨해튼의 야경도 그렇다. 맨해튼 도심을 담을 수 있는 최고의 명당은 의외로 뉴저지에 있는 해밀턴 공원이다. 이곳에서 허드슨강 너머의 도심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사진 뉴욕관광청]

어떤 여행은 풍경이 아니라 사람으로 기억된다. 미국 뉴욕이 그랬다. 벌써 10년 전 일이다. 뉴욕 한 달 살기라니 엄청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지 않은가. ‘남는 건 사진뿐’이라지만, 뉴욕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본 근사한 야경이나, 오른팔을 추켜올린 ‘자유의 여신상’ 사진 한 장 건져오지 못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10년 전 뉴욕이 떠오르는걸.

◆아내의 여행

여행자에게 좋은 집주인 만나는 것 이상의 행운도 없다. 우리에게 방을 내준 귄터와 그의 어머니는 한 달간 아침상을 차려줬다.

여행자에게 좋은 집주인 만나는 것 이상의 행운도 없다. 우리에게 방을 내준 귄터와 그의 어머니는 한 달간 아침상을 차려줬다.

2013년 11월 당시 뉴욕은 ‘공유 숙박’을 두고 불법과 합법을 가리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장기 숙소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뉴저지로 눈을 돌린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교통비도, 맨해튼을 오가는 시간도 두 배나 들었지만 다른 길이 없었다.

뉴저지 숙소의 주인장 귄터는 늦은 밤 도착하는 우리를 위해 집 앞에서 두 시간이나 기다리고 있었다. 귄터는 짐을 풀기도 전에 맨해튼 야경을 보러 가자고 했다. 플로리다에서 날아온 우리는 너무 춥고 피곤했지만 거절하지 못했다. 이 이벤트를 위해 오들오들 떨면서 기다린 사람에게 그렇게 매정하게 굴 순 없지 않은가. 그땐 어렸으니 망정이지, 10년이 지난 지금이었다면 “뼈마디가 시리다. 그만 들어가자!”고 했을 거다.

연말에만 볼 수 있는 록펠러 센터의 명물 크리스마스 트리.

연말에만 볼 수 있는 록펠러 센터의 명물 크리스마스 트리.

아름다운 것은 멀리서 봐야 한다. 남산 팔각정에서 남산 서울타워를 제대로 감상하지 못하듯, 맨해튼의 스카이라인도 가까이에서는 온전히 보기 어렵다는 걸 그때는 미처 몰랐다. 살벌한 뉴욕 물가에 떠밀려 뉴저지까지 오게 된 여행자에게 귄터는 “뉴저지의 가장 큰 자랑거리를 선물해주겠다”며 해밀턴 공원에 데려갔다. 허드슨 강 너머로 본 맨해튼 야경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귄터의 호의는 끝날 듯 끝나지 않았다. 향수 컬렉터인 그는 잠잘 때마다 ‘오늘의 향수’를 뿌려야 한다며 이 냄새 저 냄새를 뿌려줬다. 평생 그렇게 강렬한 향을 맡아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둘러본 뒤 숙소에 돌아오면 귄터는 늘 근사한 식사를 준비해 놓고 우리를 맞아줬다. 그는 우리의 여행법을 늘 궁금해했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뉴욕에서 보고 들은 것에 대해 성의껏 대답해줬다.

뉴저지의 마지막 밤 귄터와 함께 사진을 남겼다.

뉴저지의 마지막 밤 귄터와 함께 사진을 남겼다.

추수감사절을 그의 가족과 함께 보내고, 중고 의류샵에 가서 패션쇼를 벌이고, 밤마다 그가 좋아하는 1980년대 일본 여자 가수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2013년 우리의 겨울은 매일 그런 식으로 흘러갔다. 가끔은 뉴욕에 다녀온 건지, 귄터네 집에서 파자마 파티를 하고 온 건지 헷갈리지만, 찬바람이 불면 여지없이 그 시간이 그리워진다.

◆남편의 여행

타임스퀘어의 밤.

타임스퀘어의 밤.

여행 가서 돈 좀 펑펑 쓰고 싶은 도시를 꼽으라면 바로 뉴욕이다. 당시 뉴욕은 대규모 세일 행사가 한창이었다. 세상에 이토록 많은 물건이 존재한다는 걸 직접 체험한 시간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뉴욕의 쇼핑 장소는 아웃도어 전문 매장 ‘레이(REI Co-op)’다. 뉴욕 뒤에 이어질 남미 일정에 맞는 배낭을 하나 살 생각으로 들렸다가 그만 눈이 돌아 버렸다.

우리는 2년 계획으로 전 세계를 돌며 한 달 살기를 이어가는 중이었는데, 고작 20인치 기내용 캐리어가 전부였다. 부피를 줄이고자 여행지 계절 대부분을 여름으로 잡은 터라 얇은 옷만 챙겼다가, 뉴욕의 추위에 호되게 당하기도 했다. 그렇게 필요한 것 외에는 담을 수 없는 금욕의 생활을 1년 넘게 이어가던 차에 자본주의의 최전선, 그것도 쇼핑 최적의 시기에 놓이게 된 거다.

 패션에 관심이 많은 귄터를 따라 구제옷 쇼핑도 즐겼다.

패션에 관심이 많은 귄터를 따라 구제옷 쇼핑도 즐겼다.

금욕적인 가방 크기 때문에 짐을 더는 늘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넘치는 쇼핑 욕구를 억누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욕망이 터져 버리고 말았다. ‘소비의 도시 뉴욕에서만큼은 최대한 많이 소유해보자’는 마음이 자꾸 비집고 흘러나왔다.

일단 가방을 질렀다. 큰맘 먹고 지갑을 열었지만, 막상 숙소로 돌아오니, 그 옆 진열대에 있던 다른 가방이 자꾸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다음 날 다시 매장에 가서 그 가방으로 교환하고, 또 그 옆에 있던 다른 모델이 생각나서 다음 날 또 교환하고…, 결국 다섯 번이나 영수증을 들고 가서 물건을 바꾸는 만행을 저질렀다.

쇼핑 천국 뉴욕에서는 다행히 언제든 교환과 환불이 가능했다. 하루에 하나씩 예쁜 가방이 내 품에 안겼다가 떠난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욕망을 채울 수 있었다. 카운터 직원의 “또 왔냐”는 빈정거림도, 체면이나 창피함 같은 것도 욕망 앞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 그렇게 결국 100달러짜리 등산 가방 하나를 건졌다.

그때의 한(恨) 때문인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겨울 무렵이 되면 ‘호르몬 이상’처럼 쇼핑 욕구에 시달린다. 그때 사지 못했던 신발·옷·가방이 아직도 아른거린다. 뉴욕에 다시 간다면 ‘미니멀 라이프’고 뭐고,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소호(Soho)를 휘젓고 다닐 테다. 그때의 한을 꼭 풀리라.

뉴욕 한 달 살기 여행정보 · 비행시간 13시간 · 날씨 봄·가을 추천 · 언어 영어 · 물가 숙박료나 음식값은 꽤 비싸지만, 그 외 쇼핑 품목은 견딜 만하다 · 숙소 1000달러 이상(방 한 칸, 뉴저지 지역)

김은덕·백종민

김은덕·백종민

글·사진=김은덕·백종민 여행작가  think-thing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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