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넘나들며 '대선 틈새' 엿보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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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얼굴) 대통령이 다음 달 열린우리당을 떠날 것 같다. 청와대도, 열린우리당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다. 둘 사이의 불신과 불화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기 때문이다.

28일 김한길 열린우리당 원내대표가 "노 대통령은 정치에서 손떼라"고 하자 29일 이병완 대통령비서실장이 "대통령은 정치에만 전념한 적이 없다"고 받아치기도 했다. 청와대 핵심인사는 "(탈당은)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조만간 현실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어떤 계산을 하고 있는 걸까. 노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을 떠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 "노무현발(發) 정계개편"=노 대통령의 오랜 측근은 "탈당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노무현발 정계개편'이라고 표현했다. 나름대로 노 대통령이 추구하는 계산법이 있다는 얘기다. 측근에 따르면 노 대통령의 탈당 결심은 여야를 넘나드는 정치를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2007년 대선 정치에 운신의 폭을 넓히려는 의욕도 있다고 한다.

이런 의욕은 29일 목포에 내려가 한 자문자답식 발언에서도 배어 있다.

"노무현 당신 임기 얼마 안 남지 않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서남해안 개발은 국가 발전을 위해 필요한 전략이라는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추진해 가려 합니다. 힘을 모아 주십시오."

윤태영 대변인도 "임기를 못 채우는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은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씀이다. 그렇게 (하야)하겠다는 의사는 없는 것으로 본다"고 '유권해석'했다.

열린우리당이란 수단을 잃고 노 대통령은 어떤 방법으로 여야를 넘나들려는 것일까. 측근들은 이른바 '중립 내각' 구성이란 수단을 제시했다. 중립내각이란 정당적 배경을 가진 인사를 내각에서 가급적 배제하는 것이다. 정치 색깔이 적거나 한나라당이 내심 희망하는 인사들을 장관직에 앉힐 수도 있다.

이런 배경으로 이명박 전 서울시장,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손학규 전 경기지사 등 야권 후보들을 자유롭게 접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 위기상황을 당적이 없는 대통령과 차기 후보들이 머리를 맞대고 해결해 나가는 명분과 모양새를 취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물난에 시달리는 현재의 열린우리당이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실제로 노 대통령 주변에선 1992년 대선의 해에 탈당해 '현승종 중립 내각'을 구성한 노태우 전 대통령 케이스를 거론한다.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은 야당의 김대중 후보를 청와대로 초청해 식사를 같이하기도 했다. 이런 방식을 취할 경우 대통령이 임기 말 레임덕으로 힘이 빠지더라도 야당한테 "하야 하라" 같은 모진 수모나 날이 선 공세는 피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얘기다.

'탈당→중립내각→여야 벽 허물기' 시나리오는 2005년 9월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에게 대연정을 제안할 때 한 노 대통령의 말에도 묻어 있다. 이를테면 "연정은 불쑥 말한 게 아니다. 제발 (국정을 한나라당이)맡아서 서로의 이해를 높이자" "권력을 통째로 넘길 수 있다" "(연정은)정적이나 야당 정치인을 입각시키는 거국내각이 전형적 사례다" "(연정을 하면)새로운 지평과 새로운 장이 열리는 것이다" 등이다.

열린우리당의 친노 인사는 "2005년 연정 제안이 한나라당의 동의를 전제로 한 거국내각 구성이었다면, 이번엔 노 대통령이 독자적으로 중립내각을 구성하겠다는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럴 경우 노 대통령은 자력으로 권력을 재창출할 능력을 잃어버릴 수 있다. 자칫 열린우리당도 떠나고 한나라당한테도 외면당하는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할지 모른다.

◆ 사분오열 열린우리당=어쨌든 노 대통령이 이런 시나리오로 가게 되면 열린우리당은 사분오열로 치닫게 될 가능성이 크다. 김근태.정동영.천정배.신기남 등 당 주도 세력이 정권 재창출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데다 구심점이 없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의 한 중진 의원은 "지금까지는 친노 그룹들이 열린우리당에 남고 나머지가 당을 떠나는 얘기가 많았다"며 "이제는 반대로 친노 그룹이 대통령을 따라 탈당해 신당을 만들 수밖에 없지 않으냐"고 말했다. 청와대 출신의 열린우리당 인사들은 "우리가 나가면 최소한 의원 40명은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수호 기자

◆ 중립 내각이란=특정한 정당이나 정파를 배경으로 하지 않는 내각. 정치적 노선이 중립적인 인사들을 행정부 장관에 임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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