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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복룡의 신 영웅전

김옥균을 위해 몸을 던진 여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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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한말의 정객 김옥균(1851~1894)은 명문가 출신으로 인물 좋고 온갖 재주도 타고났다. 서예는 망명지에서 글씨를 팔아 생활할 정도로 뛰어났다. 1886~1887년 태평양의 절해고도 오가사와라(小笠原) 섬 유배 시절 일본의 바둑 최고수 본인방(本因坊) 슈에이(秀榮·1852~1907)가 바둑판을 메고 방문해 네 점을 두고 대국했을 정도로 바둑에도 능했다. 그는 대인관계도 폭이 넓었으나 훌륭한 참모를 만날 인연은 없었다.

김옥균이 1884년 갑신정변에 실패하고 일본에서 낭인으로 생활할 때 일본이 보기엔 이미 용도 폐기된 인물이었다. 고종이 자객을 네 명이나 보냈고, 김옥균을 위시한 개화파의 정적 리훙장이 절치부심하고 있었으니 그의 죽음은 시간문제였다. 그렇다고 일본은 당시 우익적 분위기에서 그를 죽일 수도 없어 1888~1890년엔 홋카이도로 유배 보냈다.

신영웅전

신영웅전

그때 김옥균에게 다마(玉·사진)라는 한 여인이 있었다. 절세미인도 아니었고 명문가의 딸도 아니었다. 야망을 품었거나 무슨 계산을 하지도 않은 평범한 여인이었다. 숭모하는 사이라 해서 살을 대는 깊은 관계도 아니었다. 그저 곁에서 김옥균을 도왔다. 홋카이도로 유배되자 다마도 따라가 그림자처럼 김옥균을 돌봤다. 그런데 김옥균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한 자객이 따라붙고 있었다. 대단한 야심이나 이념 없이 그저 공명심에 들뜬 무명의 낭인(浪人)이었다.

다마는 김옥균을 죽일 기회를 엿보던 낭인에게 접근해 몸을 허락했다. 다마는 어느 날 잠자리에서 그 자객을 죽이고 사라진 뒤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김옥균은 아무런 영문도 몰랐으나 이 이야기는 이후 낭인의 죽음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만약 김옥균이 재기했더라면 이 사건은 큰 이야깃거리가 됐겠지만, 김옥균은 6년이 지나 상하이에서 자객 홍종우에게 피살돼 기구한 삶을 마쳤다. 살면서 이런 연정을 만난 적 있으신지.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