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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태준의 마음 읽기

환한 세상에서 살다 가야 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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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문태준 시인

문태준 시인

그저께와 어제 제주에는 찬바람이 불고 싸라기눈과 함박눈이 내렸다. 산죽 푸른 잎에 싸라기눈이 떨어지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들었다. 바람에 회오리가 있어서 담장 아래 수선화의 꽃대는 꺾여 있었다.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서 버팀목으로 받쳐주었다.

시골 마을의 겨울밤은 더 적막하다. 그래서 작은 소리 하나도 벼락이 치는 듯이 크게 들려온다. 육지의 고향집에서 호두를 보내온 것이 있었는데, 어젯밤에는 호두를 깠다. 호두는 껍데기가 울퉁불퉁하고 단단해서 깨기가 쉽지 않았지만, 속이 꽉 차도록 잘 여문 것을 볼 적에는 흐뭇함이 있었고 또 그걸 겨울밤에 하나씩 까고 있으니 한적한 마음이 찾아왔다. 그러면서 한가한 마음의 한구석에는 이런저런, 소소하지만 인상적이었던 지난 일의 무늬가 만져지기도 했다.

스스로 내 마음속 빛 찾았으면
지금의 기쁨은 충분히 누렸으면
수평선처럼 욕망 없이 담담하길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개중의 하나는 “환한 세상에서 살다 가야 해”라는 말이었다. 이 말은 제주도 출신인 문충성 시인의 시집을 읽다 ‘생명(生命 1)-콩밭에서’라는 제목의 시에서 발견한 시구였다. 시인은 우리가 “차가움 속에 나자빠져 얼마만 한 세월을 속 썩혀 왔나”라며 탄식했다. 그러면서 마치 한 알의 콩이 어둠의 땅속에서 “눈부신 빛”을 기어코 찾으려고 하듯이 그리하여 싹트듯이 “자그마한 기쁨의 씨앗들”이 깨어나게 하라고 당부했다. 이 시구를 접했을 때 혹시 나는 나를 스스로 비탄과 절망의 흙 속에 자꾸자꾸 가두려고 하지 않았는지를 자문했다.

다른 일화도 떠올랐다. 지난달에 초등학교 동기들을 만나 함께 밥을 먹은 적이 있었다. 그날은 몇몇 동기가 송년회 모임을 갖고 난 며칠 후였다. 송년회에 참석했던 친구 가운데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송년회에 안 나온 사람 안부를 묻지 말고, 나온 사람 안부를 물어야 되는 거 아냐?” 그 친구의 말에 따르면 송년회를 갖자고 모여선 정작 모임에 나오지 않은 사람들 안부만 묻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친구의 말은 모임에 오지 않은 사람의 안부를 묻는 것이 쓸모나 득이 될 것이 없다는 뜻은 아닐 것이었다. 그런 의미보다는 내 눈앞에 있는 사람에 대한 인사와 반가움을 표현하는 일을 뒤로 미루지 않았으면 한다는 의미일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도 누군가를 만나 내 앞에 그 사람을 마주하고서도 그와 속마음을 더 충분하게 얘기하지 않은 탓에 그와 헤어지고 돌아올 때면 아쉽고 미안한 마음이 들 때가 있었다. 이런 경우는 가령 내게 큰 기쁨이 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게 온 큰 기쁨을 내 마음이 온전하게 즐길 수 있도록 그 시간을 넉넉하게 주지 않을 때가 많았다. 여기 있으면서도 딴 데를 자꾸 서성이는 그런 마음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생각난 것은 얼마 전 모임에 갔다 주고받는 대화 중에 우연히 들은 말이었다. 연장자인 그 어른은 글을 쓰는 분이었는데, 연세가 팔순이 넘었다.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이가 드니까 심심해져요. 바다를 보아도 세 해 전 바다와 달리 이제 아무 느낌이 없어요.” 그러자 그 말을 듣고 있던 한 사람이 말했다. “그게 잘 사신 겁니다. 나이가 들면 감정과 욕망에서 벗어나야 해요.” 그 어른께서 말씀하신 심심하다는 것의 의미가 어쩌면 요즘에 도통 감흥이 적어 시심(詩心)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걱정의 고백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지만, 감정의 동요 없이 만사를 그저 예사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안목을 얻은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노경(老境)에 성취할 만한 높은 경지의 시심이기도 할 테니 분명 부러운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바라봄은 수평선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앞서 소개한 문충성 시인은 ‘수평선(水平線)’이라는 시에서 “인간이 사는 땅을 자애(慈愛)의 손길로 재우고 있는 수평선(水平線)”이라고 멋지게 썼다. 격랑 너머에서 한 줄 흰 줄로 세상의 둘레가 되는, 자애의 둘레가 되는 수평선처럼 감정과 욕망을 덜어낸 그 묵묵한 자리, 덤덤하게 된 그 마음씨라면 지혜와 깨달음의 식견이 아닌가 싶었다.

우리는 마음이 한적한 때에 이르러 그동안 알게 모르게 마음에 새겨진 여럿의 무늬를 읽기도 한다. 그 무늬는 흐릿하고 잔잔한 것도 있고 짙고 격렬한 것도 있다. 화로의 불씨 같은 것도 있고 요즘의 바깥처럼 차가운 얼음 같은 것도 있다. 어젯밤에 나는 이 무늬 몇 개를 손으로 쓸어 어루만졌다. 그리고 기억의 무늬를 쓰다듬고 있노라니 무늬는 삼가게 하고 엄숙하게 해 삶에 성스럽게 머무르게 했다.

밤이 제법 깊어서야 호두를 까는 일이 끝났다. 바람 소리는 비탈이 쏟아지는 듯이 훨씬 거칠어졌다. 그러나 앞의 세 가지 일을 떠올리고 나니 내 마음도 집도 환한 빛이 감싸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그리고 내면에 천리향 화분 하나를 기르고 있는 듯이 그윽한 향기가 감돌았다.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