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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정부, 자금조달 숨통 막아 '김기즈칸'의 대우제국 몰락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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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4호 16면

손병두의 ‘IMF위기 파고를 넘어’ ⑨ 지금도 의문인 대우 그룹 해체

1998년 12월 11일 대우전자 해외법인 소속 외국인 노동자들이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빅딜 반대 총궐기대회에 참가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중앙포토]

1998년 12월 11일 대우전자 해외법인 소속 외국인 노동자들이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빅딜 반대 총궐기대회에 참가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중앙포토]

김대중(DJ)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 김우중 회장을 거의 매주 한번 정도 독대했다. 본인은 경제를 잘 모르니 김 회장에게 자문을 부탁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DJ가 “김 회장이 경제 대통령”이라며 추켜세웠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독대 횟수가 2주에 한 번, 3주에 한 번 꼴로 줄더니 나중에는 아예 사라졌다. 뭔가 오해가 있는 듯했다.

사실 김 회장은 경제관료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외환위기 극복 해법이 정부와 달랐기 때문이다. 외환위기는 외환 부족이 원인이라, 수출로 빨리 달러를 벌어서 나라 곳간을 채우면 된다는 것이 김 회장의 지론이었다. 기업이 열심히 수출할 수 있도록 정부가 수출 지원 정책을 대폭 강화해 주길 바랐다. 하루는 김중권 청와대 비서실장과 만나는 자리에서 “바짝 허리띠를 졸라매면 한 해 500억 달러 무역흑자가 가능하다”고 주장해 동석한 강봉균 경제수석과 낯을 붉히며 언쟁을 벌인 일도 있었다. 그 다음날 김 회장이 나를 불러 “어제 강 수석과 분위기가 너무 안 좋게 헤어졌으니 손 부회장이 강 수석을 만나 무마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약속을 잡고 강 수석을 만났더니 아니나 다를까 분위기가 냉랭했다. 아마도 김 회장이 강 수석을 마치 회사 임원을 야단치듯이 한 모양이었다. 강 수석은 나의 대학 5년 후배였지만 정중히 예를 갖춰 “김 회장이 직선적이고 성격이 급한 것 잘 알지 않느냐. 죄송하다고 나를 보냈다. 좀 화가 났더라도 푸시라”고 대신 사과했다.

워크아웃 열흘 뒤 수출금융 규제 풀어

강 수석은 내게도 “500억 달러 흑자가 가능하냐”고 물었다. 1998년 당시 정부의 무역수지 흑자 예상치는 28억 달러에 불과했다. 너무 차이가 컸다. 나는 “그렇잖아도 좀 과한 숫자 같아서 한국경제연구원(한경연) 좌승희 원장한테 검증을 해보라고 했더니, 수출업체와 수입품목을 조사한 결과 가능한 숫자라고 합니다”고 대답했다. 결과적으로 김우중 회장의 예상이 맞았다. 1998년 무역수지는 416억 달러 흑자였다. 그해 대우는 수출 186억 달러, 수입 43억 달러로 143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냈다. 대우 단독으로 전체 무역흑자의 34.4%를 해낸 것이다.

DJ와 김 회장의 만남이 뜸해질 무렵, 대우에 대한 자금 옥죄임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수출금융 규제가 제일 큰 타격이었다. 후에 들었지만 경제수석실에서 대우에 대해 부정적인 보고서를 계속 올렸다고 했다. 수출금융이 막히니 대우는 기업어음이나 회사채 쪽으로 자금공급원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수출금융은 부채가 아닌데 기업어음이나 회사채는 바로 부채로 계상되니 대우의 빚은 눈덩이처럼 급증했다. 기업은 살기 위해 더 많은 빚을 내고, 정부는 기업 빚이 늘었다고 비난하는 웃지 못할 현상이 벌어졌다.

또 기가 막힌 일이 있었다. 대우가 기업어음을 통해 자금조달을 하려고 하니 정부는 그룹별 한도액을 만들어 대우가 기업어음 발행을 더 이상 못하게 막았다. 게다가 회사채를 통해서 자금조달을 하려 해도 회사채 발행 한도 제한조치를 통해 대우의 자금조달 숨통을 막아 버렸다. 대우는 오도 가도 못하게 막다른 골목에 갇히게 되었다. 이즈음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한국 5대 그룹 구조조정이 미흡하다며 압박을 했다. “5대 그룹도 워크아웃에 들어갈 수 있다”는 DJ의 발언이 나온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때 노무라증권 서울지점이 ‘대우 그룹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이는 금융권에 ‘이제 정부가 대우를 포기 하는구나’라는 사인으로 인식됐다. 금융기관들은 대우에 빌려준 자금을 회수해 갔다. 이것이 대우가 워크아웃에 들어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대우 그룹 해체가 시작되었다. 대우의 성장 신화가 무너졌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며 세계를 누비던 ‘김기즈칸’의 대우 제국이 몰락했다. 김우중 회장과 국내 10만, 해외 25만 등 모두 35만 명의 대우 임직원과 그 가족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나는 지금도 대우 해체에 대해 몇 가지 의문이 있다. 정부가 대우를 해체하고 워크아웃에 들어간지 열흘 만에 꽁꽁 묶었던 수출금융을 풀어줬다. 그런데 왜 대우에게는 자금줄을 막아 더 버티지 못하게 했는가. 워크아웃에 들어갔던 대우 계열사들의 수출금융 족쇄를 풀어주고 부채를 출자전환 해주니 다 살아난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GM과 대우의 합작이 무산되게 하고 워크아웃 이후에 헐값으로 대우차를 GM에 넘긴 이유는 무엇인가. 그때 금융감독위원회가 대우의 워크아웃 추진 이유로 “대우가 밀어내기식 수출과 이로부터 창출된 매출채권을 기반으로 운전자금을 조달하는 형태를 지속했다”고 적시했지만 그 후 감사원 실사에서 ‘밀어내기식 수출은 없었다’는 것이 확인 되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김 회장 “IMF가 2년만 늦게 왔더라면”  

1998년 6월 17일 김대중 대통령이 경제 6단체장을 청와대로 초청, 오찬에 앞서 김우중 전경련 회장(왼쪽 둘째)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김 회장 바로 뒤가 손병두 전경련 부회장이다. [중앙포토]

1998년 6월 17일 김대중 대통령이 경제 6단체장을 청와대로 초청, 오찬에 앞서 김우중 전경련 회장(왼쪽 둘째)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김 회장 바로 뒤가 손병두 전경련 부회장이다. [중앙포토]

김우중 회장의 ‘수출확대를 통한 IMF 체제 극복론’과 경제 관료들의 ‘구조조정을 통한 금융위기 극복론’이 충돌한 결과 김 회장의 해법이 패하고 말았다. 정부가 이기고 시장(기업)이 진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김 회장이 패하고 대우가 패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시장경제가 패한 것이다. 세계에 심어진 대우의 브랜드 가치만 해도 엄청난 자산인데 하루 아침에 휴지조각처럼 돼 버렸다. 참으로 아깝다. 김 회장은 “IMF가 2년만 늦게 왔어도…”라면서 아쉬워하는 발언을 나에게 혼잣말처럼 한 적도 있다. 그 동안 세계 도처에 투자한 공장들이 수익을 창출하여 투자원금도 회수될 수 있고 막대한 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어서 한 말이었을 것이다.

대우가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금 모으기 운동’을 처음 제안하고 전개한 사실을 국민들은 잘 모르고 있을 것 같다. 김 회장은 그 동안 대우가 금 수입 수출을 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우리 국민들이 갖고 있는 금을 모아서 수출하면 외환 보유고를 늘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부의 승인을 받아 대우센터 1층에 창구를 개설하고 전사적으로 금 모으기 운동을 시작했다. 3일 만에 약 1500명이 참여하여 약 100만 달러에 해당하는 100㎏의 금을 모았다.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주택은행 전국지점에 창구를 개설하여 351만 명의 시민들이 결혼반지, 돌반지 등을 들고 참여했다. 그해 4월 중단 때까지 총 227t 18억 달러에 달하는 실적을 보였다. 외국인들도 놀랐다. 우리 국민이 위기 앞에서 놀라운 단합정신을 보였기 때문이다. 마치 일제강점기 때 국채보상운동을 했던 것과 같았다. 이렇게 보면 외환위기 때 가장 큰 공을 세운 대우가 아이로니컬하게도 최대의 피해자가 되었다. 역사는 이것을 어떻게 평가할까.

김 회장이 한국을 떠난 후 그분의 소재에 대해 언론에서 알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프랑스에 있다거나 태국에 있다, 베트남에 있다는 보도가 가끔 나왔다. 내가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을 그만두었을 때 김 회장 비서로부터 전화가 왔다. 김 회장이 만나고 싶어 한다며 다음날 집으로 차를 보내겠다고 했다. 아내에게도 행선지를 말하지 않고 비서를 따라 방콕 어느 음식점에서 김 회장을 만났다. 반가움을 표시할 겨를도 없이 김 회장은 내가 왜 전경련을 그만두게 되었는지 말해 달라고 했다. 그렇게 오찬을 한 후 나는 바로 서울로 돌아왔다. 아무에게도 그 만남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2009년 2월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했을 때다. 김 회장이 조문을 하고 싶다고 전화를 했다. 나는 김 회장과 부인 정희자 회장 두 분을 모시고 명동성당에 갔다. 조문을 마치고 나와 승용차를 타고 떠나려는데 기자들이 알아보고 차를 에워쌌다. 김 회장도 어쩔 수 없이 창문을 내리고 기자들 질문을 받았다. 다른 질문에는 묵묵부답이었으나 누군가가 “김 회장님, 세례를 받을 겁니까?”하고 물었다. 김 회장이 “예”라고 답했다.

그 뒤 김 회장이 수원 아주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정 회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우리 부부가 영세를 받기로 했으니 주선해 달라”고 했다. 김 회장 집 근처 방배4동 성당 이동익 신부에게 연락해서 2018년 9월 19일 아주대 병원으로 잡았다. 김 회장 대부는 내가, 정 회장 대모는 내 아내가 서기로 했다. 세례명은 이 신부가 정했는데 김 회장은 바오로, 정 회장은 마리아로 했다. 김 회장은 전통적인 개신교 집안이고 정 회장은 불교 집안이었다. 김 회장은 투병 중에도 병상에서 뭔가를 계속 백지에 쓰고 있었고 혼잣말로 “잘 될 거야”라고 했다. 김 회장이 전경련 회장 때도, 대우가 해체된 이후에도 남을 원망하거나 비난하는 말을 하는 것을 난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다가 2019년 12월 9일 아주대 병원에서 향년 82세로 생을 마감했다. 묘소에서 김 회장을 떠나보내며 가슴에 깊은 슬픔이 응어리졌다. 우리 세대 월급쟁이의 우상이요, 젊은이들의 꿈이었던 김 회장은 ‘세계 경영’의 꿈을 다 이루지 못하고 그렇게 떠났다. 장례식은 천주교식으로 치뤄졌다. 나는 하느님의 자비로 김회장의 영혼이 천국에서 평화의 안식을 누리길 기도했다.

손병두. 동서투자자문 사장과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등 경제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서강대 총장, KBS 이사장, 호암재단 이사장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다채로운 활동을 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전경련 상근부회장으로서 정부와 재계의 입장을 절충하며‘빅딜’과 구조조정을 조율하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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