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강운구, 한국 예술가들 초상 125분의 1초 찰나에 담다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874호 17면

예술가와 친구들

강운구의 최근작 ‘이러다가 문득 사라진다(2023 서울 용산)’.

강운구의 최근작 ‘이러다가 문득 사라진다(2023 서울 용산)’.

강운구는 사진가다. 서양에서는 사진을 포토그라피라 한다. 빛(포토)의 그림(그라피)이란 뜻이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는 초상화를 사진이라 했다. 한 인물의 진실된 면모를 옮긴다는 뜻이다. 몇 년 전 강운구는 사진집 『사람의 그때』를 발간했다. 거기에 그가 이제껏 만났던 화가, 문인 등 한국을 대표하는 백 명 정도 되는 예술가의 모습을 추려서 담았다. 예술가의 골기와 진정성이 또렷하게 전해지는 그의 사진들은 조선시대의 초상화인 ‘사진’을 방불케 한다. 조선 시대의 화공이라면 몇 달에 걸쳐서 그렸을 ‘사진’을 강운구는 대상에 대한 온축의 기운을 찰나에 방전하듯이 1/125초라는 짧은 순간의 단 한 방으로 찍어내었다.

대학 산악반 들어가 전국 돌며 사진 찍어

강운구는 1941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대구로 와서 자랐다. 계성고등학교와 경북대 영문학과를 다녔다. 카메라를 처음 만져본 것은 고등학생 때다. 카메라가 귀할 때였다. 어떤 이는 사진관에서 카메라를 빌어쓰기도 했다. 강운구는 친척집에서 아그파 카메라를 빌어 사진을 찍었다. 대학에 들어가자 부친이 일제 소형카메라를 사다 주었다. 교통이 좋지 않아 여행이 힘들었던 시절, 산악반에 들어가니 전국여행을 마음껏 할 수가 있었다. 사진가 강운구의 손에는 늘 카메라가 쥐어져 있었다.

서헌강이 찍은 최근의 강운구 모습.

서헌강이 찍은 최근의 강운구 모습.

대학 2학년 때 청구대학(현재의 영남대학) 주최로 열린 ‘전국대학생 사진 콘테스트’에 출품했다. 이 무렵 대구에는 리얼리즘 계열의 대구사광회와 조형성을 강조하는 대구사우회라는 2개의 사진단체가 있었다. 콘테스트의 심사위원이었던 김재수가 강운구를 찾아와서 대구사우회의 회원이 되어달라고 했다. 회원 중에 대학생은 강운구가 유일했다. 본격적인 사진가가 되었다는 확신이 돋아났다.

경북대 본관 지하실에는 사진관이 있었다. 학교의 행사와 수학여행 등을 도맡아 촬영하는 사진사가 경영하던 사진관이었다. 암실이 있었다. 강운구는 이 암실에서 사진 작업을 했다. 해외여행과 국제운송이 힘들던 시대여서 사진, 판화 등 이동이 쉬운 예술 장르의 국제전이 상대적으로 빈번하게 열렸다. 국내의 많은 사진가들이 해외의 살롱전에 출품했다. 강운구는 홍콩, 싱가포르의 살롱전에서 좋은 활약을 보였다. 대학 2학년 때, 군대를 다녀왔다. 만기제대를 하려면 3년이 걸리는데, 대학생이 전방의 DMZ를 지원하면 1년 6개월만 근무하고 제대하게 하는 제도가 있었다. 군대 복무를 짧게 마치고 복학을 하여 3학년이 되었을 때, 임응식(1912~2001)의 주도로 ‘한국창작사진가협회’가 생겼다. 대학생 회원은 강운구와 주명덕(1940~), 단 두 명 뿐이었다. 둘은 서로를 의식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조선일보 견습기자 시험에 응시했다. 시험을 치러 상경하여 광화문 지하도를 걷는데 등사판으로 만든 전시회 광고가 보였다. ‘홀트씨 고아원-섞여진 이름들’이란 타이틀이 걸린 주명덕사진전이었다. 전시장은 광화문 근처 USIS(미국공보원)였다. 전시장엘 가보니 주명덕이 없었다. 의자에 겉옷을 벗어 걸쳐놓고 갔다는 건 근처 어딘가에 있다 함인데 찾을 길이 없었다. 조선일보의 사진부장은 유명한 사진가 정범태(1928~2019)였다. 조선일보 근처에는 아리스다방이 있었다. 호방한 풍모의 소설가 이병주가 여기저기에 연재하던 소설의 원고를 아리스다방에서 배급하거나 가끔 쓰기도 했다. 여상(女像)이라는 여성잡지에 근무하던 주명덕이 아리스다방에 나타나 강운구를 찾았다. 파이프 담배를 문 주명덕의 품새는 동년배이지만 큰형님처럼 노숙해 보였다. 앞으로 평생 친구가 될 이십대 청년 사진가 두 사람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사진을 찍다보면 찍기 편한 인물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인물도 있다. 화가 장욱진(1917~1990)은 카메라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렌즈에 담긴 표정이 늘 편안하고 자연스러웠다. 미술계의 포토제닉은 단연코 장욱진이다. 한번은 서울대 병원 환자복을 입은 헛헛한 모습의 장욱진이 인사동에 나타났다. 병원 생활이 너무 답답했던지 연건동의 서울대 병원에서 인사동까지 무작정 걸어왔던 것. 차비도 술값도 없는 빈손이었다. 강운구를 발견한 장욱진은 막무가내로 한잔하러 가자 했다. 술을 못 마시는 강운구는 장욱진의 술친구가 되어주어야만 했다. 환자복의 빈털터리 장욱진, 가장 장욱진다운 모습이었다. 장욱진의 진실된 또다른 면모를 ‘사진’으로 담을 수 있는 천재일우의 순간, 아쉽게도 강운구의 손에는 카메라가 없었다. 사진은 필름이 아닌 머릿속에 새겨야만 했다.

백남준(1932~2006)은 카메라 앞에만 서면 연극적으로 변신했다. 미국과 유럽에서 세계적인 아티스트들과 경쟁하면서 살아온 탓인지 카메라 앞의 백남준은 포즈가 인위적이고 과장된 데가 있었다. 한번은 강운구가 인사동을 걸어가는데 저쪽에서 백남준과 백남준의 절친인 원화랑의 정기용(1932~)이 걸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강운구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강운구는 가게 쪽으로 몸을 반쯤 숨긴 채 재빨리 카메라를 꺼내어 두 사람을 찍었다. 찍힌 줄도 모른 채 렌즈에 포착된 백남준의 모습은 드물게 자연스러웠다.

『경주 남산』사진집 천 년 전 빛깔 재현

울산 반구대와 중앙아시아의 암각화를 기록한 강운구의 ‘사진 또는 암각화’ 전시가 뮤지엄한미 삼청별관에서 열리고 있다. 왼쪽부터 서헌강, 강운구, 주명덕, 민병헌, 주정일. [사진 황인]

울산 반구대와 중앙아시아의 암각화를 기록한 강운구의 ‘사진 또는 암각화’ 전시가 뮤지엄한미 삼청별관에서 열리고 있다. 왼쪽부터 서헌강, 강운구, 주명덕, 민병헌, 주정일. [사진 황인]

강운구와 가장 가까웠던 화가는 박고석(1917~2002)이다. 두 사람은 자주 산행을 함께 했다. 서울 근교의 북한산과 도봉산은 당일치기, 설악산이라면 2박 3일의 코스였다. 과묵한 두 사람은 조용히 산을 오른다. 설악산 꼭대기쯤 올라왔다면 힘들게 올라온 게 아까워서라도 대부분의 화가들은 스케치를 하기 마련이다. 박고석은 가만히 풍경이 자신에게로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기다려도 풍경이 다가오지 않으면 안 그렸다. 그러면 예전에 풍경이 확 다가왔던 곳을 떠올리며 거기로 가자 한다. 그곳이 어딘지는 강운구가 잘 기억하고 있다. 박고석은 한 장면을 반복적으로 그렸다. 정상인이 50㎜ 렌즈의 시각을 가졌다면, 박고석은 90㎜ 렌즈의 시각을 가졌다. 화각이 좁은 대신 집중력이 뛰어났다. 종이 위에 연필을 그어대는 속도가 엄청났다. 옆에서 강운구는 4B연필을 부지런히 계속 깎아 주어야만 했다. 화개의 쌍계사 벚꽃 그림, 백양산 그림 등 박고석이 남긴 수많은 그림에는 강운구의 그림자가 묻어있다.

1975년 동아일보 해직기자가 된 강운구는 프리랜서가 되기로 결심했다. 월간지 『뿌리 깊은 나무』, 『샘이 깊은 물』의 대표 한창기(1936~1997)는 강운구의 그런 뜻을 잘 이해했다. 일주일에 한 이틀만 회사로 나와서 일을 하는 조건이 받아들여졌다. 강운구에게 재미나는 일감이 주어졌다. 열화당의 이기웅(1940~)대표가 찾아와서 『경주 남산』이라는 책을 계약했다. 열화당은 차량 지원을 하는 등 적극적이었다.

강운구는 천 년 전 경주 남산의 감각을 살리고 싶었다. 천 년 전의 경주는 지금보다 공기는 더 깨끗하고 하늘은 더 맑았을 것이다. 사람들의 시력도 훨씬 더 좋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물은 더 깊고 선명하게 보였을 것이다. 이런 감각을 재현하기 위해 해상도가 뛰어난 ‘후지 벨비아 50’ 필름과 UV필터를 썼다. 심도가 깊고 콘트라스트가 강한 천 년 전 경주의 빛깔이 나왔다. 바위에 새긴 불상들에 거칠고 강한 명암의 붓질을 가하니 경주 사람의 얼굴이 되어 드러났다. 북디자인은 정병규(1946~)가 맡았다. 강운구는 정병규를 경주 남산의 촬영현장에 동행했다. 책에서 남산의 기운을 조금이라도 더 살리고자 함이었다.

강운구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 이어 최근에는 중앙아시아의 암각화 사진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암각화는 짐승을 그린 것이 9할, 사람을 그린 것이 1할이다. 사진가는 사람에 집중하기로 했다. 강운구는 ‘사람의 그때’를 기억한다. 함께 살아온 얼마 전 그때의 한국 예술가들과 아득한 그때, 천 년 전의 신라와 먼 옛날의 중앙아시아의 시공간을 인연으로 엮어가는 마디에 ‘사람의 그때’가 있다. 나타났다 필경은 사라질 그 얼굴들을 천상 사진가 강운구는 어제도 오늘도 응시하고 있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