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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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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어떤 발언이나 행동이 마음속에 그냥 남아 똑같은 형태로 나타나는 행위를 우리는 고집(固執)이라고 부른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개념이나 행동은 여기에 끼어들기 어렵다. 내 생각이 최고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게 마련이다. 남이 뭐라고 하든 곁눈질하지 않아 독선으로 흐르기 십상이다.

이 고집이 병리학적으로 깊어지면 '보속(保續:줄곧 이어짐)'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실어(失語) 등을 비롯한 좀 더 심각한 증세로 옮겨가는 것이다. 보속 현상은 여러 질문에 대해서도 자신의 한 생각을 반복적으로 표현한다. 글씨를 쓰거나 행동하는 데 있어서도 같은 경우가 나타난다.

고집은 일종의 집착이자,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여겨 남들의 생각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 아만(我慢)의 다른 형태이기 쉽다. 산스크리트어 아스미마나의 번역어인 아만은 '나는 …이다'라는 자신만의 주장을 최고로 치부해 주변의 객관적 환경과 흐름에 눈뜨지 못한다.

불가(佛家)에서 이 현상은 일종의 번뇌로 간주된다. 기회 있을 때마다 "내가…"라며 자신의 좁은 생각이나 소견을 주장해 지지 않으려는 태도로 주위 사람들과 숱한 갈등과 마찰을 불러들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오기라고 불리는 인사 관행은 고집쯤에 해당한다.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나 KBS 정연주 사장의 임명 강행은 노무현 대통령의 오래된 인사 관행이다. 반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밀어붙이는 관행을 대통령의 고집이겠거니 하면서 오랫동안 지켜봐 왔던 게 저간의 사정이다.

하지만 하야(下野)를 자주 거론하는 데에 대해서는 좀 심각한 불안이 따른다. 제도적 불안정으로 이어지기 십상인 말이 최고 통치권자의 입에서 자주 나오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고집의 다음 단계인 '보속 현상'이 아닌지 의심해 볼 만하다.

산스크리트어 두타(dhuta:頭陀)는 '버린다'는 뜻이다. 집착을 벗어버리기 위해서는 이 버리는 행위, 즉 두타행이 필요하다고 불가는 가르친다. 집착과 아만, 탐착과 아집을 두루 벗어야 번뇌를 끊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대통령 노무현'으로 상징되는 대통령의 코드는 우리 사회에 본질에서 벗어난 잡음만을 양상했다는 의미에서 잘못된 집착이다. 아울러 현 정권의 실정에만 편승하려는 야당도 다른 한 집착자의 모습에서 멀지 않다. 벗어버림으로써 큰 즐거움을 찾자는 불가의 지혜를 대통령과 정치권 모두 넌지시 받아들여 보는 게 어떨까. 우리 사회의 큰 화합을 위해서 말이다.

유광종 베이징 특파원